<조금 위험한 과외> W.제이치(blog.naver.com/jae_ch) -2차 수정을 금합니다!^_^ "선생님, 이거 모르겠어요." 소름끼치도록 낮은 그 목소리가 뭘 뜻하는지 알면서도 종현은 태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를..?" 종현의 물음에 민호가 친절히도 문제 하나를 딱 가리키며 대답한다. "여기, 이 문제요." 문제까지 짚으며 말하자 더이상 피할 길이 없어진 종현은 할 수 없이 민호의 문제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슥- 몸을 기울자마자, 역시나 허리에 감겨오는 건 민호의 길고 단단한 팔.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조금.. 위험한 과외.. # 1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라 그런지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고, 햇살도 따사로웠다. 길가에 가로수들은 노랗고 빨갛게 예쁘게도 물이들어 있었다. 게다가 주말인지라 공원으로 소풍가는 가족들, 친구들끼리 단풍구경 가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등으로 길거리가 매우 북적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들 더이상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 표정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 화창한 날씨인데다 일요일인데, 대체 무슨 걱정이 있을까..!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걱정들을 모두 혼자 짊어진 듯, 이보다 더 우울할 수는 없는 표정으로 무거워 보이는 크로스 백을 어깨에 걸치고 걸어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너도나도 행복하게 웃고있는 사람들 사이로 혼자 어두운 표정을 하고선, 한숨을 푹푹쉬며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의 결좋아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은 햇빛에 의해 좀더 연하고 부드럽게 보였으며, 따스한 햇살에 비해 조금 찬 바람 때문에 걸친 하늘하늘한 밝은톤의 가디건이 그의 인상을 좀더 밝아 보이게 해주었다. 얼핏보면 그는 단풍이 든 길가를 거닐고 있는 한가로운 대학생 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의 표정은 옆에있는 사람도 우울하게 만들만 할 정도로 침울했다. 대학생이 아니라, 그와 상반되는 재수생의 표정이랄까.. 화사한 가을날씨에 맞지 않게, 잔뜩 혼이난 강아지 마냥 축- 쳐져있는 그는, 서울에 있는 유명한 Y대학교의 신입생 김종현이었다. 종현은 이렇게 화창한 주말에 바로 어제부터 시작한 과외를 하러 학생의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정도의 학벌에, 괜찮은 페이를 받으며 과외까지 하는 그가 이렇게 우울하게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문제의' 과외 때문이었다. "에휴..." 한숨을 아무리 쉬어도 땅은 꺼질 기미도 보이질 않았으나, 종현은 연거푸 한숨만 쉬어댔다. 아직 과외시간까지는 약 한시간 정도나 남은지라 종현은 아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로스백도 덩달아 쿵- 소리를 내며 벤치에 아무렇게나 올려졌다. 종현은 눈을 감고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만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찬바람이라도 더 쐬면 답없는 머리에 해답이라도 생길까해서.. 문득, 종현은 갈색빛이도는 눈동자를 들어 높디높은 가을하늘을 바라보았다. 티없이 맑은 하늘과 손을 올려 만져보고 싶은만큼 깨끗한 구름들이 종현의 눈안에 가득 들어찼다. 종현은 그 뭉실뭉실 떠다니는 하얀 구름들을 눈안에 담으며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 . . 때는 바야흐로 이틀전이었다. 종현은 여느때 처럼 학교를 갔다가 과제를 잔뜩 안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걸려온 기범의 전화 한통이 종현의 인생(?)을 확 바꾸어 버릴줄 누가 알았을까.. 연락도 잘 안하던 한살 차이의 사촌동생 기범이 오랜만에 종현에게 전화를 해서는 뜬금없이 하는말은, 종현의 과외를 잡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깐. 내가 아는애 중에 공부 지지리도 못하는 애 있는데, 걔네 부모님이 과외선생님을 구한다고 했다구. "그..럼 내가 해도 되는거야?" -형 정도 학벌이면 아주 땡큐인거지! 게다가.. 형 신빛그룹..알지? "당연하지! 내가 간첩이야?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신빛그룹도 모르게.." -걔가 신빛그룹에 최회장 막내아들이야. 최민호라고.. "아~ 신빛그룹 회장의 막내아들 최민ㅎ...응...? 신빛그룹.. 아들..?!" -어. 아마 액수도 형이 원하는 만큼 해줄껄. 한번 해봐. 요새 돈때문에 힘들다며. 큰어머니한테 다 들었어. "......." -잘해봐. 아마 최민ㅎ...@#%/$.. 빵빵-!! "응? 뭐라구? 차소리 때문에 잘 못들었어." -음.. 별거 아냐. 여튼 과외한번 해보고 싶다면서. 이번 기회에 해봐. 아마 왠만한 알바 두세개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을껄. "...어. 고마워." -그럼 수고. 뚝- 깔끔하게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종현은 잠시 고민을 했다. 과외를 하는건 좋은데, 자그마치 신빛그룹이라니.. 이건 너무 스케일이 컸다. 그런 귀하신 도련님한테 뭐하나 잘못가르쳤다가는... 막.. 경찰서라던가.. 그런데에.. "아.. 어떡하지.." 엄청난 갈등을 하던 종현은, 저 밑에 지방에서 서울에 혼자 올라와 있는 아들을 뒷바라지 하기위해 애쓰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홀로 굳은 의지를 다졌다. "그래..!! 일단 부딪혀 보는거야..!!" 하지만.. 떵떵거리며 말을 했어도, 여전히 걱정이 되는건 마찬가지.. 종현이 그 집에 연락을 할까말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종현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종현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고쳐잡고, 액정을 확인했다. 액정 화면에 기범에게서 온 문자라고 찍혀있었다. 종현은 왠지모를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확인버튼을 눌러서 문자 내용을 읽어보았다. [형이 또 우물쭈물하고 있을까봐 내가 방금 연락해놨어. 내일 밑에 써져있는 주소로 2시까지 가면돼. 토요일이라 시간되지? 그럼 잘해봐 - 기범] 그 밑엔 서울 XX구 XX동 어디어디라고 친절히 주소까지 씌여져 있었다. 기범의 통보에 황당하고도 허무해진 종현이었지만, 곧 종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고액과외를 할 수 있을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대망의 과외첫날.. 즉, 어제가 되시겠다. 종현은 최대한 어른스러워 보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를 하고 평상시 처럼 간단히 입고 집에서 나왔다. 그래.. 과외 선생님도 후드티 입고, 물빠진 청바지를 입을 수 있는거지 뭐.. 라고 자기합리화를 시켜가며.. 종현은 무려 십분이나 일찍 과외하는 학생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나서.. 제일먼저 보이는 어마어마한 대문을 보고 기겁을 했다. 겨우겨우 눌러놨던 긴장이 다시 샘솟는 듯 했다. 하지만.. 곧 비장한 표정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고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띵동- 띵동- 비장한 표정으로 열심히도 띵동거리는 초인종을 꼿꼿히 노려보고있는 종현을 누군가가 본다면.. 아마.. 낯선사람을 경계하는 강아지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것이다. 생긴것 부터가 원체 동글동글한게 강아지처럼 생긴지라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종현이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초인종을 바라보고 있는데, 곧 어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종현은 괜시리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아.. 저, 저.. 과외하러.." -아, 들어오세요~ 비장한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애처롭게 덜덜 떨리기만 한 종현이었다. 웃음기 서린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철컹- 하고 문이 열리는 바람에 종현은 또 숨을 잔뜩 집어 삼키고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넓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앞에 예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커다란 벽돌집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우와.." 종현의 눈은 휘둥그레지며, 우리나라에 이런집이 존재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종현은 정원을 이리저리 구경을 하며, 혹시라도 이렇게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는 잔디를 밟을까봐 동그란 돌부분에만 조심조심 발을 딛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정원을 의외로 빨리 가로질러 그 벽돌집앞에 도착한 종현은 다시금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초인종을 또 누르기 위해 검지손가락을 막 들어올렸을 때였다. 쿵-!!! "으아-!!!" 갑자기 열려버린 문에 종현은 코를 제대로 박아버리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마저 핑- 돌았지만, 선생님 씩이나 되서 울수는 없단 마음에 눈에 힘을 팍 주고 아픔을 참는 종현이었다. "어머! 괜찮아요, 학생?!" 문을 열고나온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으며 종현을 이리저리 살폈다. 코가 새빨개진채 일렁이는 눈을 하고있는 종현을 본다면, 누구나 걱정을 했을 것이다. 지금의 이 아주머니처럼.. "아야야.. 괘..괜찮아요. 하하.." "미안해요. 대문 열어드린지 한참 됬는데도, 현관 초인종이 안울리길래 무슨일인가 나와본다는게 그만... 근데.. 진짜 괜찮아요?" 정원이 이렇게 넓은데 당연히 오래걸리는거 아닌가..? 종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근데 코..피가.." "예?!" 설마설마 했는데, 코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 정녕 피란말인가-!! 체질상 피를 보지도, 피 비린내를 맡지도 못하는 종현은 속이 뒤틀리는 듯했지만, 과외하는 학생집에서 난리를 칠 수는 없기에 숨을 참으며 말을 했다. 아니, 말을 쥐어짰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저.. ㅎ..휴지..좀.. 빠..빨리요!" 당황한 아주머니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갔고, 현관앞에 남겨진 종현은 코를 막은채 눈을 감고 진정하려 애쓰고 있었다. 왜 하필 이럴때에..!! 종현은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얼굴에 공을 맞고 코피를 흘리는 바람에 기절해서, 양호실까지 업혀갔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중학교때는 혈액형 응집반응을 실험하다가, 친구놈 한테 붙잡혀 억지로 찔린 자신의 손가락에서 찔끔 흘러나온 피를 보고는.. 심지어 응급실까지 실려갔었던가.. 그나마 이제는 성인인지라 어느정도 면역이 생기긴 했지만, 머리가 어질거리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코에선 계속 피비린내가 올라오고 있고.. 대문이 한개.. 두개.. 아니, 세개인가..? 종현이 헤롱거리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데, 현관이 열리고 아주머니가 다시 헐레벌떡 나오셨다. "안들어 오시고 뭐하세요?! 일단, 피부터..!" "으으.." 아주머니는 물을 묻힌 솜을 종현에 코에 쑤셔박아(?) 넣어 지혈을 하고는, 비틀거리는 종현을 부축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종현은 흐느적거리며 따라 들어가서는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건내는 찬물을 마시고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괜찮아요? 상태가 많이 안좋아 보이는데, 수업은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으니깐 걱정 마세요! 아, 근데.. 혹시.. 민호 어머님 되세요..?" "아, 저는 가정부에요. 내 소개를 깜빡했네~ 호호호~" 아주머니는 호탕하게 웃으셨다. 인상이 좋아보이는 아주머니라 종현은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리는 듯 했으나.. 갑자기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깜짝놀라서 바라보았다. "그럼! 올라가 보세요~ 시간 다 된 것 같으니깐.." "네.. 근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이층에 올라가셔서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가시면 되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전 올라가 보겠습니다!" "네~ 있다가 과일 내갈께요~" 종현은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는 이층으로 향하는 층계를 오르며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보았던 넓은 집안을 휙휙- 둘러보았다. 대충 둘러보기만 해도 집안이 부유하다는 티를 팍팍내고 있는지라, 종현은 다시 기가 팍- 죽었다. 하지만, 자신은 부자는 아니더라도, 과외 선생님이라는 떳떳한 직위(?)를 갖고있다는 생각에, 종현은 자신감을 가지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향했다. 두근두근- 종현은 긴장으로 인해 두근거리는 심장을 한손으로 꾹- 누르고는, 노크를 했다. 똑똑- 하지만.. 아무런 기척조차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종현은 다시한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역시 돌아오는건 정적뿐.. 종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이번엔 조금세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쾅쾅- "안에 아무도 없어요?!" 그때.. 벌컥- 하고 바로 옆에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비적비적 걸어나오는 기다란 실루엣..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하품을 찌익- 하며 나온 남자의 눈이 정확히 종현에게로 향했다. 멍하니 노크하던 자세 그대로 있던 종현은 화들짝 놀라며 뻘쭘하게 손을 내렸다. 종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남자가 그제서야 입을 떼었다. "..뭐하냐." "저... 그.. 그게.." 종현은 갑자기 등장한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소유한 기럭지남을 보자 기가 팍 죽어서 우물쭈물 대다가 말했다. "저는.. 최민호..라는 학생.. 과외 해주기로 한.. 그.." "아, 과외선생?" "그..런데요..?" 종현은 말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사람은 누군데 처음보는 사람한테 반말을 하지?! 게다가.. 어..려보이는데..?! 종현이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을 열심히 해석하고 있을때, 그 기럭지남이 종현에게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말을 해주었다. "과외를 화장실에서 하나?" "...네?" 기럭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종현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곧 '헉!'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 줄기차게 노크를 해대던 문의 손잡이를 돌려서 열었다. 휑~ 정말 찬바람이 쌩- 불정도로 휑하니 넓은 화장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종현의 얼굴은 곧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화장실문을 두드리며 아무도 없냐고 소리를 지르는 자신이 얼마나 웃기게 보였을까.. 첫날부터 이런 어벙한 모습을 보이다니..! "부..분명히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라고 했는데.." 종현이 혼자서 우물우물거리자, 기럭지남이 자신이 방금 막 나온 문을 긴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며 말했다. "눈은, 폼으로 달고다니냐." "......." 아.. 방이 하나가 더 있었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말을 꼭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하다니..! 키만 멀대같이 크면 다인가?! 종현이 속으로 발끈, 했으나.. 그 기럭지남은 다시 뒤돌아서 아까 나왔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뭐..뭐야 쟤는..!! 종현이 황당하다는 듯이 기럭지남이 들어간 방만 멀거니 서서 쳐다보고 있자, 안에서 들려오는 그 기럭지남 특유의 저음.. "들어오던지. 과외수업 한다며." "......." 설마.. 최민호라는 학생이.. 저.. 저저.. 기럭지남...?! 종현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아,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수업한다면서 침대에 길게 늘어져 있는 저 건방진 기럭지가 바로 최민호라.. 이거지..?! 좋아! 절대 기죽을 거 없어! 기범이랑 동갑이니깐.. 나보다 한살씩이나 어리다- 이거야..! 종현은 민호보다 한 살이 많은거에 왠지모를 자신감이 생기며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곧바로 당당한 걸음걸이로 바꿔서 책상앞에 턱- 하니 섰다. 그리고, 쿵- 소리를 내며 책상위에 요란하게 크로스 백을 내려놓았다. 민호는 뭐하냐는 식으로 종현을 쳐다보았지만, 종현은 굴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 하나를 빼서 앉고는 크로스 백에서 몇권의 책과 프린트물을 꺼내놓았다. 민호는 아예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종현이 뭘하는지 구경했다. 종현이 준비를 끝내놓고선 책상위를 탁탁 두드렸다. "자, 민호야- 수업해야지!" "허...!" 종현의 말에 헛웃음부터 치는 민호였다. 자기보다도 어려보이는 사람이 수업을 하자고 책상을 탁탁 두드리는 모습이 여간 황당한게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는 쾅쾅거리는 소리에 나가봤더니 화장실 앞에서 원맨쇼를 하고 있지를 않나.. 민호가 뚱한 표정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그 자세로 계속 자신을 똑바로 쳐다봐왔지만, 종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한번 책상을 탁탁탁- 하고 두드리며 말했다. "수..수업안해? 빨리와서 앉아!" "......." 종현이 자신이 어서와서 앉길 바란다는 기대어린 표정으로 너무 빤히 바라봐오자, 민호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책상쪽으로 걸어왔다. 종현은 속으로 안도를 했다. 그래..! 이렇게만 하면돼! 부잣집 아들 공부시키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것 같... "야- 비켜. 거기 내자리야." "..그래 알았어.." 았지만.. 아무래도 순탄하지 않은 수업이 될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툭- ".......!!" "........."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자리를 옆으로 옮기던 도중 책상위에 떨어진 얼룩덜룩한 하얀 물체.. 정확히 말하자면.. 종현이 잠시 잊고있었던, 자신의 코를 틀어막고 있던 피묻은 솜이 되시겠다. 종현은 피가 굳어서 갈색빛이 도는 그 솜뭉치를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아까 오다가 현관에 코를 박아서, 피가 났는데..! 솜으로 지혈을 하다가.. 빼는 걸 잊었거든.. 근데, 저절로 빠져버렸..네.. 하하..하.." "......." 민호는 빨간입술을 잘도 오물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은 종현을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저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변명이 무색해 질만큼 아무런 반응이 없는 민호를 보자, 종현은 식은땀이 삐질 나는것을 느끼며 재빨리 수업을 시작하였다. . . . 이렇듯 종현의 첫 과외는 참으로 험난하기 짝이없었다. 게다가 최민호라는 잘나신 대기업의 자제는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아무 반응도 없어서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한 살이나 어린 주제에 반말이나 찍찍하고, 무엇보다도.. 왠지모를 무서운 포스를 풍긴다는 점이 종현의 스트레스를 가증시켰다. "한 살이나 어린 고등학생한테 쫄다니.. 그래..! 내가 나이랑 학벌로는 뒤지지 않는다 이거야! 어린 놈이 꼬박꼬박 반말이나 써대고.. 어디 두고보자..!" 밴치에 앉아서 열심히 아자아자를 외치는 종현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으나, 종현에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종현은 오늘 민호에게 반말을 쓰지 말것을 요구하기로 결심했다. 과외선생님이 되서 학생한테 무시당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 2 딩동- 두번째로 누르는 초인종이지만, 역시나 긴장이 되는건 마찬가지이다. 종현은 이 긴장이 오래 지속되지 않길 바라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바로 어제 왔었기에, 종현을 기억하시는 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종현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코를 박지 않도록 몇번씩이나 주의를 하고 들어간 종현이었더랬다.. 한번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종현은, 이번엔 민호의 방으로 제대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민호야- 안에 있니?"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묵묵부답.. 종현은 참을 인 자를 머리속에 되뇌이며 다시 노크를 했다. 똑똑똑- "민호야! 이번에도 대답 안하면 그냥 들어간다?!" 얼마간 기다려도 답이 없자, 종현은 문고리를 살짝 돌렸다. 그리곤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 종현은 들어가다 침대위를 보고 놀라서 잠시 멈칫- 했다. 저.. 저 자식은 왜 웃통을 벗고 자고 난리야..! 자신도 열이많은 탓에 집에서는 속옷만 달랑 입고있을 때가 많긴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괜시리 얼굴이 후끈해지는 종현이었다. 우.. 우씨이.. 과외할 시간이라는 것도 모르나..? 하지만, 민호라면 충분히 모르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한 종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로 갔다. 그리고 트레이닝 복 하의만 입은채 엎드려서 자고있는 민호를 깨우기 위해 등으로 손을 가져갔으나... 등에 흥건한 땀을 보고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한 종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운동이라도 한 듯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마침, 종현의 눈에 들어오는건 창가쪽에 자리잡고있는 런닝머신.. 종현은 침대도 채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좁은 자췻방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민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건지 민호의 잔근육들이 눈에 띄었다. 종현은 운동을 안해서 그저 마르고 매끈(?)하기만 한 자신의 몸에대해 새삼스레 위축되는 느낌을 받으며, 같은 남자지만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민호의 팔뚝을 괜시리 꾹꾹 눌러보았다. 우와.. 단단하기까지.. 부럽다... 그때... 스윽- "으앗..!" 종현은 갑자기 민호의 팔뚝을 쿡쿡 찌르던 자신의 손목이 무언가에 의해 단단히 붙잡히자 놀라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언제 잠에서 깬건지 민호가 반쯤 눈을 뜨고선 종현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종현쪽으로 돌렸다. 종현은 처음 보았을 때 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민호에, 아까 했던 다짐이고 뭐고 다시 바짝 긴장을 했다. "뭐야.." 자다 깨서 목이 잠겨서 그런지 민호는 어제보다 한 옥타브는 더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일어났어..? 나.. 난 그냥, 너가 안 일어나길래.." 종현은 대답을 하면서 속으로는, 민호의 목소리가 섹시하게 들린건 민호가 단지 웃통을 벗고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런 종현의 속을 알리가 없는 민호는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종현의 손목을 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종현은 민호한테 잡힌 자신의 손목에 힘을 주고 뒤로 빼내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이것좀.." "......." 민호는 자신이 종현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던 건지, 종현이 힘을 주자 별다른 말없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종현이 손을 빼내자마자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어..어디가..?!" "샤워하러." "수..수업은..!!" "씻고나와서. 땀냄새 맡으면서 수업할래?"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업시간인데.. 할 수 없지 뭐.. "아..알았어. 대신 빨리 씻고 나와!" 아무리 수업이 중요하더라도 두시간 내내 땀냄새를 맡기는 싫은 종현인지라 허락을 했다. 뭐.. 종현이 허락을 안했더라도 그냥 씻으러 갔을 민호였지만.. 민호가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씻을 동안, 종현은 책을 펴놓고 오늘 수업할 내용을 점검했다. 어제 보니깐 이것도 모르는 것 같고, 저것도 모르는 것 같고, 그럼 이것도 모르나..? 아니,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건가.. 도통 반응이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종현은 혼자서 심각한 고민을 하며 열심히 문제집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그렸다. 그러다 문득, 종현은 아까부터 지속되던 서늘한 느낌에 방안을 둘러보았다. "헉.." 정말 헉소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선선한 가을 날씨에 에어컨을 트는 사람도 있구나.. 종현운 에어컨에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 잘못 되기라도 할까봐, 끄지도 못하고 그저 가디건만 더 꼭꼭 여민채 하던 것을 계속 했다. "하암- 얘는 왜이렇게 안나오지.. 가르칠 것도 많은데.." 민호가 시간이 꽤 지나도 나오지 않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만 해대던 종현은 점차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더니 아예 입까지 헤- 벌리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후.. "참나.. 가지가지 하네." 민호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흠냐흠냐 거리며 잘도 자고 있는 종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민호는 빨리 나오라고 재촉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든 종현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호는 종현에게로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는 모습을 내려다 보니,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많은 얼굴이었다. 원체 몸에 베어있는 듯한 애교나, 종현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순수함이 언뜻언뜻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자는 모습을 보니 자신보다 한살많은 스무살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애같았다. "으음..." 민호는 뒤척이며 몸을 살짝 떠는 종현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의 방이 조금 춥다는 것을 인지했다. 운동을 하느라 더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틀었기 때문에 공기가 바깥 못지않게 찼던 것이다. 게다가, 종현의 가디건은 거기에 맞지 않게 얇기까지 했다.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쓸일이 없어서 옷장 깊숙히 쳐박아 두었던 담요를 꺼내서 종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자신이 덮으면 턱없이 부족한 크기인데다 어울리지도 않는 담요이지만, 종현에게는 아주 딱인 담요였다. 민호가 담요를 살며시 덮어주자, 종현은 그 담요에 폭- 파묻힌 꼴이 되었다. 민호는 종현의 몸집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왜소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여전히 숨을 색색 내쉬며 잘 잠들어 있는 종현을 뒤로하고 민호또한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리고 몸을 종현쪽으로 돌려서 책상에 엎드린 종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왠지 이번 과외는 꽤 오래 갈 것 같다고.. . .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종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현재 시각은 4시 30분.. 즉, 수업이 끝나고도 30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종현이 당황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툭- 하고 종현은 어께에서 담요가 흘러내려 떨어졌다. 종현은 담요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난 파란 바탕에 꼬부기가 그려져 있는 담요를 덮은기억이 없는데.. 설마... "풋.." 민호 취향이 보기 보다 참 아동틱.. 아니 이게 아니지..! 수업시간에 잠이 든 나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깨우지도 않고 담요까지 덮어놓고 그냥 자게 놔두다니! 이건 수업에 대한 기본이 안되있는거야! "너 말이야!" 종현은 침대에서 태연하게 누워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를 보고있는 민호를 향해 말했다. 종현이 허리에 팔까지 척- 올리고는 잔소리를 할 폼으로 서있자, 민호는 귀찮다는 듯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뭐." "내가 자면 깨워야지, 어떻게 담요까지 덮어놓고 그대로 자게 할 수가 있어?!" "..그래서." "ㅁ..뭐?!" "넌 과외시간에 자놓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이..이게..! 그렇게 불꽃카리스마를 마구 풍기면 누가 쫄 줄 알고..! "어디서 선생님한테 그런 말버릇을! 너..! 이제 나한테 존댓말써!" "할말 없으니깐 말돌리기는." 우씨이.. 그렇게 나온다- 이거야?! "너..! 자꾸 그러면, 고등학생 주제에 하늘같은 과외선생님한테 반말쓴다고 너네 어머니한테 다 말한다?!" 이것으로써 종현의 승리로 끝나는가 했지만.. "그럼 난 과외선생님이 수업도 안해주고, 와서 퍼질러 잔다고 해야겠네-" "......." K.O. 이것으로 종현의 잔소리하기+존댓말 쓰게하기 프로젝트는 완벽한 실패로 끝이났다. 종현은 씩씩거리며 입술을 꾹- 깨문채 민호를 째려보았지만, 민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종현을 마주보았다. "너.. 두고봐..!" 종현은 민호에게 이렇게 멋지게(?) 명대사를 날려주고는 쿵쿵거리며 민호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혼자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비죽 흘러나온 눈물을 남몰래 훔쳤다. 나중에 꼭 복수하고 마리라..! 하지만, 종현은 알지 못했다. 민호가 종현이 나가고나서 정말로 재밌다는 듯이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는 것을.. 종현이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자, 여전히 여유롭게 침대에 엎드려 있던 민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귀엽긴.." 민호는 종현이 잘때부터 보고있던 영자신문을 슬쩍 덮어놓고는 몸을 뒤집어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다음주 주말이나 되야 있을 과외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기분이었다. . . . "하암-" 교수님의 강의는 계속 되고있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는 종현은 잠시 강의를 뒤로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차피 교양수업이니깐 잠깐 딴짓한다 해도 크게 손해볼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창밖에는 이젠 낙엽이 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풍이 꽤 예쁘게 들어있었는데, 벌써 낙엽이 떨어지다니.. 날씨도 하룻밤 사이에 꽤많이 쌀쌀해 졌고.. 종현이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한번 울렸다. 종현이 책상밑으로 슬쩍 액정을 확인해 보니, 기범에게서 온 문자였다. [주말에 과외는 잘 했어? -기범] 잠시 바깥 풍경에 졎어서 잊고 있었던,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른 종현이었다. 과외를 잘.. 했냐고..? 잘..!!! 했을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애를 소개시켜 줄 수가 있지?!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런 고생스런 과외를 하게 된 원인이 다 기범이 때문인 것 같은 종현이었다. 물론, 학생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덥썩 물어서 다짜고짜 과외를 시작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애초부터 민호를 소개해 준건, 기범이 아니었던가..!! 종현은 기범에게 전화해서, 지금 민호 때문에 울화병에 걸릴 지경이라 하소연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집념(?) 하나로 지루하고 긴 교수님의 강의를 겨우 견뎌내었다. 뚜- 뚜- 뚜- 신호음은 열심히 가고 있는데, 기범이 전화를 받지 않자, 종현은 기운이 빠져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먼저 문자를 보내놓고 전화를 씹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람.. 종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아직 다음 강의까지는 시간이 꽤 남은지라 햇빛 아래에서 광합성이라도 할 생각인 종현이었다. 그 때.. "종현아!!" 꽤 익숙한 목소리가 종현의 귀를 파고들었다. 종현은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짓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아, 선배. 오랜만이에요." "뭐가 오랜만이야~ 저번주에도 봐놓구선." 빠른 걸음으로 종현에게로 와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하는 남자는 종현의 과 선배, 진기였다. 진기는 별다른 말 없이 자신과 맞춰서 다시 걸어가는 종현을 보고 종현에게 무슨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종현아. 너 무슨일 있지?" "..무슨 일은요.." "얼굴에 다 써있거든요. 한번 선배한테 다- 털어놔봐! 혹시 몰라?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일지." 진기의 말에 종현은 잠시 고민을 했다. 뭐.. 고민 한번 털어논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건 아니니깐.. . . "뭐? 무슨 그렇게 싸가지 없는 자식이..!" "그러니까요.." 분위기 좋은 한 카페에서 진기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를 탁- 내려놓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종현은 방금 막 나온 뜨거운 코코아를 슬슬 저으며 웅얼울얼 대답했다. "그래서, 걔네 부모님 한테는 말씀드려봤어?" "아..아뇨.." "왜?! 당연히 그런 녀석의 부모님과는 진지하게 상담을 해봤었어야지..!" "그게.. 걔네 부모님이 많이 바쁘셔서.." "아니, 얼마나 바쁘시길래 자기 자식에 대해 상담 한번을 못해?" "신빛그룹 회장이랑 사모님이니깐 바쁜건 당연하죠 뭐.." "......." 종현의 말에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한 진기였다. 신..빛 그룹이라니..? 우리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영향력 있는 그룹이 바로 신빛그룹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종현이 과외하는 학생은 당연히 아직 고등학생인 신빛그룹의 막내아들 일것이고.. 잠깐! 막내아들이라면.. 그 유명한 사고뭉치.. "최민호?!" "..엥? 선배가 민호를 어떻게 아세요?" "진짜야?! 네가 과외 한다는 애가 신빛그룹 막내아들 최민호야?" "..네." "모르는게 이상한거지!! 그 유명한 최민호를 어떻게..!" "왜..왜 그러는데요, 선배..?" "너 그 소문 몰라? 신빛그룹 막내아들만 유독 엇나가서, 패싸움 같은거 벌이는 건 일도 아니고, 경찰서도 꽤나 들락거렸나봐." 패싸움에, 겨..경찰서?! "당연히 공부는 안하고 툭하면 싸움질에, 완전 망나니 기질이 다분한 막내아들이 언론에 노출되는거 막으려고, 신빛 그룹에서 애를 많이 써서 아직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아마 거의 사실에 가까울거야." "......." 종현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쩐지 첫인상부터 예사롭지 않다했어.. 그럼 자신은 지금 그렇게 유명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망나니와 과외를 한다.. 이 말인가..?! "안돼애!!!!" 갑자기 종현이 절규아닌 절규를 하자, 진기도 깜짝 놀라 재빨리 뒷수습을 했다. "그.. 그렇게 걱정하지마, 종현아. 설마 과외 선생님 한테 뭔짓이야 하겠니.." 참 위로가 됩니다, 선배..? 종현은 울상이 되었다. 앞으로도 쭉- 한번에 두시간씩 일주일에 두번, 그것도 황금같은 주말에.. 그 망나니와 함께 과외를 해야된다는 말이 아닌가..! 종현은 절망을 맛보았다. 왜 하필 첫 과외 학생이 최민호인 것인가.. 종현이 울먹거리자 진기가 종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네가 더 나이도 많고, 위치도 위치인지라 함부로 못 할 테니깐 너무 겁먹지는 마, 종현아." "그..치만.." "자자- 표정 풀고! 내가 조만간 한번 술 사줄테니깐, 그때 실컷 스트레스 풀자, 응?" "...네.. 선배.." 종현은 아까부터 계속 진동이 울리던 진기의 주머니를 의식하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진기는 그런 종현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한번 헤집어 놓고는 말했다. "지금 교수님이 부르셔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나 먼저 가도 되지..?" "그럼요! 바쁘신 것 같은데 빨리 가보세요." "응. 천천히 마시다 가~" "네- 안녕히 가세요 선배!" 진기가 종현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는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도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인 종현을 뒤로하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종현은 진기가 가자,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진기의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한색의 커피에서는 여전히 김이나고 있었고, 종현의 코코아 또한 마찬가지 였다. 종현이 후룩- 하고 코코아를 한모금 마시며 문가를 바라보면, 어떻게 알았는지 뒤돌아서 발랄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진기가 있다. 종현이 마주 손을 흔들고는 다시 테이블위의 커피로 시선을 옮겼다. 커피가 너무 탁해서 괜시리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지금쯤 자신의 눈동자도 저렇게 탁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종현은 꽤 오랫동안 카페에 홀로 앉아있었다. . . . 시간은 무섭게도 빨리갔다.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민호와의 과외가 벌써 하루앞으로 껑충 다가와 있으니 말이다. 종현은 학교 도서관에서 열심히 레포트에 쓸 자료를 찾고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종현이 책장 한장을 넘기고 한숨을 쉬고, 또 한장을 넘기고 다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반복하고 있을 때, 종현에게 반가운 문자가 하나 왔다. 바로, 진기가 오늘 저녁에 술을 사준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종현은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안을 느끼며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선배! 그럼 저녁은 제가 살께요~ㅎㅅㅎ] 마지막에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붙여서 문자를 보낸 종현이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옆사람이 시끄럽다는 듯이 자신을 계속 째려보는 것도 모른채.. "자, 먼저 한잔 받아!" 진기가 종현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종현은 오랜만에 오는 고깃집에 잠시 연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붉어진 눈을 하고선 술을 받았다. 그리고 진기에게도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선배..!! 제가 선배 많이 좋아하는거 알죠..?!" 종현의 말에 진기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크흠- 얘가 아직 술도 안마셨는데 벌써 취했나.." "그런건 아니구요.. 그냥 맨날 제가 힘든 일 있을때 도와주는 건 늘 선배인 것 같아서요오.." 종현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작게 말하자 진기가 푸핫- 웃어버렸다. 종현이 갑자기 웃는 진기에 깜짝 놀라 동그란 강아지 눈을 하고선 진기를 보자, 진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은 학과 선배가 귀여운 후배 챙겨주는 건 당연한거지~" 그 말에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종현이 앞에 있는 소주를 한모금 마셨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소주를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오늘따라 소주도 이상한 맛이었다. 그 이유가 내일 있을 거사(?)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종현의 마음은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는 고기들 앞에서 다시 울적해져만 갔다. . . . "아 씨발.." "......." 탕-!! 학교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현재 기분이 상당히 저기압인 민호가 애꿎은 깡통을 발로 차자, 민호의 한 학년 후배인 태민은 그저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깡통을 무심히 눈으로 쫓았다. 민호가 찬 깡통은 하필이면 어느 상고 남학생 무리 중 한명의 머리위로 안착했다. 그것도 별로 질이 안좋기로 유명한 상고 학생의. 왠만해선 빽이 어마하고 성격도 불같은 민호를 건드는 이는 없었는데, 이 학생들은 민호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인지, 민호에게 시비를 걸었다. 껄렁껄렁하게 민호와 태민에게로 다가온 패거리들 중, 깡통을 맞은 녀석이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누구냐? 감히 나의 머리에 깡통을 던진 좆만한 새끼가-" "......." 민호는 자신보다도 한참 작은 그 녀석을 내려다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아까 깡통보다 더 빈 깡통소리가 나던 머리통이 너냐?" "ㅁ..뭐?!! 이새끼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짜고짜 주먹부터 내지르는 녀석에 민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볍게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그 녀석한테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태민이 잡아끌었다. "쓸데없는 것들이랑 시간낭비 하지말고 가요, 형." "저..새끼가 지금 누굴보고..!" "후우.." 민호는, 태민의 말에 또 발끈해서 뭐라뭐라 소리쳐대는 무리들을 뒤로한채 한숨을 내쉬고 그냥 돌아섰다. 왠만해선 자신의 속이 시원해 질때까지 상대에게 주먹질을 가한 다음에야 돌아서는 민호였지만, 자칫 일이 커졌다가는 내일까지 파장이 계속 될 수도 있었다. 민호는 내일 있을 과외를 떠올리고는 주먹을 꽉- 쥐고는 태민과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뒤에서 겁나서 덤비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신의 신경을 긁는 말들만 밷어내는 무리때문에 상당히 열이 받아있는 민호였다. 태민은 무슨 생각인지 태연한 표정으로, 아직도 분노에 차있는 민호의 옆에서 그저 덤덤히 걸어갈 뿐이었다. 민호와 태민이 골목을 벗어나서 큰 길가로 나왔을 때이다. 민호가 앞에 있는 껍데기 집에서 나오는 연기에 눈을 찌푸리며 무심코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민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 "......?" # 3 온통 붉어진 얼굴을 한 채 헤실헤실 잘도 웃으며, 앞에있는 남자의 입에 상추쌈을 넣어주는 한 남자가 있었다. 편한 후드티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 차림인 그의 동글동글한 눈망울이, 꽤나 멀리서 봐도 풀려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상추쌈을 받아먹은 남자가 뭐라뭐라 말을하자 까르르 웃으며 귀엽게 손벽까지 치는 남자였다. 민호는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알게된지 일주일도 채 안되었지만 어느새 민호에게는 꽤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되었으므로.. 이름하여.. "김..종현.." 많이 친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애라고 생각하고 있던 친구인 기범으로부터 어쩌다가 소개받은 귀찮은 과외선생. 첫 날부터 코에 허연 솜을 박고 오더니, 웃기게도 화장실 문만 두드려 대던 이상한 사람. 강아지 처럼 생겨가지고는 나름 선생이라고 뭘 가르치려 하긴 하기만, 자신이 눈만 부라리면 한껏 쫄아서 축- 쳐지는 웃기는 사람. 과외 하러 와서 졸리다고 자놓고선 왜 안깨웠냐고 도리어 자신한테 투정을 부리는 황당한 사람. 생각보다 귀엽게 생긴데다가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자꾸만 신경쓰이게 하는 사람.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다른 남자와 헤헤 거리면서 상당히 거슬리게 하고 있는 사람.. 민호에게는, 언제 이렇게 종현이 자신에게 꽤나 관심이 가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과는 반대로 인상이 좋아보이는 어떤 남자와 화기애애하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종현이 너무도 거슬릴 뿐이었다. 민호가 한 곳을 쳐다보며 주먹쥔 손을 부르르 떨고있자, 의아하게 여긴 태민이 민호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그냥 술에 꽤나 취한 것 처럼 보이는 귀염성 있는 남자 한명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단정한 외모의 남자 한명이 있을 뿐이었다. 태민이 왜 그러냐는 뜻을 눈에 담고 민호를 보자, 민호는 태민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 쪽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새로운 과외선생이야." "누가요?" "저기 헤실헤실 웃고 있는 사람. 내일 수업준비는 안하고 노닥거리고 있다니.." 농담섞인 말투와는 다르게 민호의 눈은 너무도 진지하게 분노를 담고 있었다. 태민은 뭐에 대한 분노인지는 몰랐으나 흥미로움을 느꼈다. 천하의 최민호가 수업준비를 안하는 한날 과외선생 때문에 분노를 느낀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어떤 과외선생이든, 수업을 빼려고 별 핑계를 다 만든건 민호가 아니었던가.. 태민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다시 그쪽을 바라보려 하는데, 민호가 성큼성큼 그곳을 지나쳐서 앞서 걸어갔다. 입술을 꾹- 다문채 걸어가는 민호를 보고 태민은 더이상 묻지 않고 민호를 따라 갔다. 그러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 다시 그 귀엽게 생긴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가그리 좋은지 계속 실실 웃고만 있던 남자의 몸이 일순간 중심을 못잡았는지 휘청거렸고, 같이 있던 남자가 허리를 감싸서 자신에게 기대게 하였다. 둘이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상당히 묘했다. "안오고 뭐해." "가요." 태민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자, 민호가 뒤를 돌아 태민을 보았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다시한번 종현을 향해 시선을 옮기다 그 장면을 보았다. 민호가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태민은 일순간 민호의 표정이 싸악- 굳어버리는 것을 그대로 목격했다. 하지만, 민호는 보지 못했다. 태민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내일까지 아까 그 새끼들 신상 알아와." "내일이요?" 한참만에 민호가 꺼낸 말에 태민이 되물었다. "어. 잡아서 족쳐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내일 중요한 일 있다면서요. 아까 규현선배 부탁도 거절하셨으면서. 선배가 그거 거절하실때 규현선배 표정 못보셨어요?" 똑 부러지는 태민의 말에 민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일 과외를 할 마음은 없었다. 아까 그 꼴을 다 보고나니, 종현을 만난다면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하게 될지 자신조차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약속 취소하면 돼. 그냥 알아오라면 알아와." "..알았어요." 태민이 속으로 생각했다. 민호가 자신이 그렇게도 잘 따르던 규현선배의 부탁까지 거절했던 이유인 중요한 약속이, 어쩌면 아까 그 사람과의 과외일지도 모른다고.. 아니, 거의 맞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과외선생과 민호사이에 뭔가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뭔가..재미가 있어지는데..?' 태민의 입꼬리는 민호가 보지 않는 사이 또다시 슬쩍 올라갔다. . . .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진기선배~" "아니야. 어어- 조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허름한 오피스텔의 유리문으로 향하는 종현을, 진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있었다. 만취 상태인 종현은 얼굴은 홍당무처럼 온통 빨개진 채, 그저 헤헤 웃으며 진기에게 손을 몇번이고 흔들고는 뒤돌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진기는 종현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한숨을 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저렇게 마셔서 종현이 내일 그 문제의 과외수업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진기는 종현을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깜깜한 밤길을 홀로 걸어나갔다. "으으.. 추워어.." 밤에 그렇게 술을 들이붓고 들어와서는 이불도 덮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그대로 잠이 든 종현이었다. 쌀쌀하다못해 춥기까지한 아침(?)을 맞이한 종현이 엉금엉금 기어서 자다가 아무대나 벗어논 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눈을 잔뜩 찌푸리고 핸드폰 화면을 본 종현이었다. 핸드폰 액정은 1:30 이라고 친절히도 현재 시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종현은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늘이 강의가 없는 주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안심하고 방 한쪽 구석에 깔려있는 매트리스 위에 다시 몸을 뉘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틀려서 더이상 일어날 기운도 없는 종현이었다. 조금 뒤.. "흐아악!! 미쳤어미쳤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덕분에(?) 더욱 괴성이 되버린 비명을 내지르며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난 종현은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을 잠시 잊고 있었던 종현이다. 당연히 그건 민호와의 과외였다. "으씨.. 두시에 시작인데 어떡하지..?" 종현은 알람을 듣지도 못한 자신을 마구 책망하며 대충 양치와 세수만 하고, 붕- 뜬 머리는 물묻힌 빗으로 슥슥 빗었다. 민호네 집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이 버스, 저 버스 갈아타는 것 보단 차라리 뛰어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라고 판단한 종현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30분 쯤 걸리니깐 뛰면 제시간에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종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옷을 입고, 크로스 백을 어깨에 맸다. 2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라, 종현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흐릿흐릿 했지만, 종현은 설마 비가 오겠어 하는 마음으로 그냥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우산을 챙기러 다시 올라갈 시간도 없으니 말이다. 종현은 일단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몽롱한 머리에,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뛰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으나,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못할 것은 없었다. 종현은 뛰고, 또 뛰었다. 종현은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났다. 아니, 이렇게 뛰어 본 적이 있는지도 이젠 모를 정도였다. 땀이 비오듯 흘러서 아무렇게나 껴 입은 반팔 티가 땀에 흠뻑 졎어있었다. 조금 있으면 그 위에 걸친 가디건 마저 땀에 졎을 지경이었다. 종현은 2시 하고도 약 5분정도 지난 뒤에서야 민호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거리며 민호네 집 초인종을 누르고는 종현은 대문에 주륵- 하고 기대서 앉았다. 띵동- 띵동- "헉..헉..헉.." 종현은 초인종을 들으며 심호흡을 하면서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 결과, 뛰어서 쿵쾅쿵쾅 뛰어대던 심장은 진정이 되었지만, 속이 무지 안좋다는 느낌을 받은 종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을 진탕으로 마시고 해장도 안하고, 채 다 깨기도 전에 그 몽롱한 상태로 뛰어 온 종현이었다. 당연히 속이 뒤집힐 만도 했다. 종현은 견디기가 괴로운 건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이상하게 반응이 없는 초인종을 다시 한번 누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우르릉- 응..? 이게 대체 무슨 소리..? 종현이 초인종을 채 누르기도 전에 난 소리에,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위해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가 자신이 그 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알려주었으니깐. "뭐..뭐야..!" 흐려서 걱정은 했지만, 정말로 비가 오니 당황한 종현이었다. 우산도 없어서 비를 그대로 맞게된 종현은 다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동-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문을 열리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누구냐고 물어봐 오지도 않았다. 아주머니가 안계시나..? 아니, 그렇다쳐도 민호는 있어야 할텐데.. 종현이 인내심을 가지고 대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아무도 안계세요?!" 띵동- 띵동- 하지만, 역시 묵묵부답- 가뜩이나 힘든데 비까지 오니, 종현은 너무 지쳐서 다시 주저 앉았다. 분명히 민호가 수업을 잊고 나간게 분명했다. 금방 오겠지.. 이 근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종현은 민호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어지러운 머리를 대문에 기대었다. 민호의 번호를 미리 알아두지 못한 것에대해 뼈저리게 후회를 하며.. . . . 퍼억- 퍽- 퍽- 비가 쏟아지고 있는 넓은 공터에서 교복의 무리가 어지럽게 엉켜있다. 말간 빗물 사이에 붉은 피도 섞여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험한 싸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중심에서,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에 이미 푹 졎어버린 교복하의와 하얀 와이셔츠만 걸치고 있는 기럭지는, 당연 최민호가 되시겠다. "이야아아-!!!" 퍼억-!! "악!!" 저번에 민호와 시비가 붙어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녀석이 기합을 넣으며 민호에게 달려들자, 민호는 몸을 슬쩍 기울여서 피한다음, 바로 발을 내질러 그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서, 흙탕물에 한번 뒹군 녀석의 멱살을 잡아서 상체를 들어올리고는 그 특유의 낮은 저음으로 경고했다. "다음부턴," 퍼억- "나 마주치면," 퍼억- 퍽- "조용히 지나가라-" 퍽-!! 아무런 표정도 없는 시린 무표정으로 그 녀석을 무참히 짓밟은 민호가 허리를 펴며, 어제처럼 귀찮아 질 일은 없으라라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무의식 중에 종현을 떠올렸다. 지금 과외할 시간인데.. 기다리고 있으려나..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민호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 녀석의 무리들 중 한명이 민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꽤 세게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지라 조금 타격이 있었던 민호는 다시금 싸움에 집중을 했다. 그리고 눈을 번뜩이며 앞에 있는 무리들을 상대했다. "집중을 안하셨나봐요." "......." 정곡을 찌르는 태민의 말에 민호는 할말이 없어졌다. 민호로서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런 자잘한 싸움에서 맞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민호는 종현을 다시 떠올렸다. 마음 한 켠에 살짝 찜찜한 부분이 없지않아 있었다. 비도 오는데 설마 기다리겠어. 민호가 또다시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딴 생각을 하자, 태민이 이번엔 좀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어제, 그 과외선생 때문이죠?"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닌것 같은데." 태민은 자신의 말에 조금 날카롭게 반응한 민호를 보고 거의 확신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것이라고.. 민호는 비에 졎은게 찝찝하기도 하고, 한대 맞은 것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기도 해서, 태민과의 뒷풀이에 가지않고, 그냥 집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냥 가라. 난 집에 가봐야 겠다." "..들어가 보세요." 태민은 멈추어 서서 앞서서 빠르게 걸어가는 민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호기심이 더 생겨버렸다. 최민호를 조급하게 만드는 그 문제의 과외선생에 대해.. 집으로 가는 내내 민호의 발걸음은 조금씩 더 빨라졌다. 왜 그러는 지는 자신도 몰랐으나, 나중에는 아예 뛰기까지 했다. 중간에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원래대로라면 과외 수업이 끝나기 30분 전인 3시 반이었다. 민호는 자신의 집이 있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그리고, 집이 있는 쪽으로 막 코너를 돌았다. 멀리 자신의 집이 보였고, 그 앞엔 역시나 아무도 없는 듯 했으나.. "......!" 어떤 자그마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비에 온통 젖어서 더 작아보이는 몸이 민호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민호는 이젠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설마.. 대문에 기대어 앉아있는 사람이.. 추워... 얼마나 이 앞에서 떨었는지 종현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돌아 갈까말까 수없이 많이 고민을 한 종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냥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가려고도 했었다. 어차피 민호도 과외를 잊은 것 같고, 집에 아무도 없는것 같으니 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명분이 과외 선.생.님.인데.. 이 생각이 종현의 발목을 잡았다. 끝내는 민호가 오기 전까진 갈 수는 없다고 마음먹은 종현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실날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호가 과외를 잊은게 아니라, 피치못할 사정으로 조금 늦는 것 일 수도 있다는.. 물론 그럴 확률이 너무나 적기는 하지만 종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여러가지 생각과 추측이 종현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러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는 아예 머릿속은 거의 공황상태가 되어버렸다. 몸도 안좋은 상태에서 비까지 너무 많이 맞아서 종현은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추웠다. 뼈속까지 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사이, 비까지 내리는데 얇은 반팔과 가디건으로 버티기 힘든건 당연했다. 종현은 자신이 생각없이 너무 급하게만 나온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 게다가 이젠 몸도 제대로 못가눌 정도니, 돌아가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서 그저 누군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종현이었다. 종현의 짙은 청색의 면바지가 빗물에 졎어 검은색으로 물든채 스키니인 마냥 다리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종현은 대문에 기대어 앉아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머리를 숙이면 누가 지나가도 못보고 지나칠까봐 숙이지도 못하고 대문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놓았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비는 꽤나 오래도록 왔으며, 종현은 그렇게 비를 맞으며 그저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폰을 꺼내 친구한테 도와달라고 연락이라도 하려했지만 이미 물을 잔뜩 먹은 핸드폰은 무용지물이 된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몸안에 가득 차있는 알코올 때문에 속까지 울렁거려서 그저 대문에만 몸을 의지하고 있는 종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할 길마저 없었다. 종현은 점차 무기력 해져갔다. 민호는 커녕 그 누구도 이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다. 종현의 희망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바보같이.. 대체 뭘 믿고 아까 돌아가지 않았던 거지..? 누가 오긴 올까..? 아니, 오늘안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빗물은 차가웠지만 종현의 입술을 통해 새어나온 숨은 너무도 뜨거웠다. 종현은 울고만 싶었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애초부터 과외를 시작한 것이 잘못일 수도 있었다. 민호에 대한 종현의 희망과 믿음이 이젠 짙은 후회와 원망으로 변해버렸다. 빗물과는 조금 다른 좀더 뜨거운 무언가가 빗물에 섞여서 종현의 볼을타고 흘렀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졌다. 종현은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민호가 원망스럽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자꾸 민호를 떠올리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자꾸만 기대하고 싶은걸.. 종현이 걱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진짜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 4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종현의 귀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박자가 일정하면서도 빠른 것이 급하게 어딘가를 가는 듯 했다. 이쪽으로 오는걸까..? 너무 걸음이 빨라서 못보고 그냥 지나치면 어떡하지..? 미약하게 나마 정신이 든 종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에 범벅이 되있는 눈물이 그와중에 부끄러운건 둘째치고, 비에 젖은 머리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깨질 듯 아팠던 지라 감각이 무뎌진 듯 했는데, 정신이 다시 드니 다시금 아픈 감각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종현이 고개를 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 발자국 소리는 점점 커지고.. 이제 확실히 누군가가 근접한 거리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종현은 팔에 묻었던 고개를 조금 들어서 여전히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는 바닥을 응시했다. 빗물이 튀기고 있는 바닥이 이리저리 출렁거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이내 멎고.. 곧이어 종현의 시야에 잔뜩 젖은 신발이 들어왔다. 종현은 멍하니 자신의 눈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쳐다보았다. 빗물에 가득 졎은 흙투성이의 제법 큼지막한 운동화는 왠지 모르게 다급함을 담고있었다. 마치 급하게 달려온 것 처럼.. 종현은 그냥 직감적으로 이 발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이 맞길 바라며 무거운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발을 지나 교복바지를 입은 긴 다리가 쭉 이어졌고, 곧이어 단추가 두세개는 풀린 흰색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비에 졎어있었고, 어디서 뒹굴다가 온건지 이곳저곳에 얼룩이 져있었다. 종현이 머뭇거리며 시선을 좀더 위로 들자,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두 눈동자와 마주 하게 되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조금 화난 빛을 띄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민호였다.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만든 원인이자, 아까부터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인.. 화부터 나야 하는데 갑자기 안심이 된 탓인지 눈물이 먼저 나와버렸다. "흐으윽.. 으흡.." 애처롭게 울음을 터뜨리는 종현을 화난 눈으로 지켜보던 민호가 입을 열었다. "너, 병신이냐..?"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화난 억양을 하고있었다. 종현은 그저 울음을 밷어낼 뿐이었다. 바보처럼 그저 울고있는 종현을 보다, 더 화가 난 민호는 속사포처럼 말을 밷어냈다. "너.. 병신이냐고! 왜 대답을 안해!! 그냥 가면되지 왜 멍청하게 여지껏 비맞으면서 기다리고 있냐고!!" "흐으으..흑흑..!!" 도리어 자신에게 화를 내는 민호에게 종현은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안쓰럽게 덜덜떨며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종현에 민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치겠다.." 무릎을 굽혀 앉아서 종현과 눈높이를 맞춘 민호가 손을 올려 조금 숙여진 종현의 턱을 들어올렸다. "으..흑...흐으.." 보는 사람도 안타깝게 할 정도로 서럽게 울던 종현의 얼굴을 마주한 민호는, 종현의 팔을 당겨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서 그대로 품에 안았다. 얇게 입어서 종현의 마른 몸이 여실히 느껴진 민호였다. 자신도 몸이 차가웠지만, 한참이나 비를 맞아 종현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종현에게 민호는 너무도 따뜻했다. 민호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순간적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종현이 민호의 옷자락을 쥐었다. 민호는 자신의 옷을 꾸욱 움껴쥔 종현을 보고 중얼거렸다. "내가, 미치겠다고.. 너 때문에." 오늘따라 더 여리게만 느껴지는 종현이었다. "흐으윽.. 나쁜자식..!" 민호의 품에 안겨서 울던 종현이 민호의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치며 말했다. 민호가 자신의 가슴을 치던 종현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미안.." "흐으.. 흐읍, 흑.." "미안하다.." 민호가 종현의 등을 쓸며 사과를 했다. 이렇게 여린 사람을 두고 대체 뭘 하다 온건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무리 어제 종현 때문에 기분이 안좋아 졌다고 오늘 집에 아주머니도 안계신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패싸움을 하러 나갔던 자신에게 화가났다. 종현의 울음이 그칠때까지 계속 종현을 안고 달래주던 민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후우.. 집이 어디야." 민호의 말에, 종현이 웅얼웅얼 대답을 했다. 비를 맞으며 데려다 주기엔 조금 멀다 싶어서, 민호가 종현을 안아들고 카드로 대문을 열었다. 갑자기 자신을 안고 집에 대문으로 들어서는 민호에 놀란 종현이 눈을 크게뜨고 민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민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종현을 안고 마당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 여기저기에 물이 뚝뚝 떨어져서 바닥에 물이 흥건해 졌지만 민호는 개의치 않고 종현을 자신의 방까지 안고 갔다. "으..!!" 갑자기 자신의 팔을 다급히 잡은 종현에 민호가 당황해서 물었다. "왜그래?" "ㅎ..화장실.. 빨리..!"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입술이 파래진 종현을 보고 민호는 종현을 안고 화장실까지 가서 내려주었다. 그러자, 바로 변기쪽으로 기어가더니 속을 개워내는 종현이었다. 속이 울렁거리던 차에 민호에게 안겨서 계속 몸이 흔들린 탓에 결국은 올라온 것이었다. 민호는 어제 고깃집에서 종현이 있던 테이블에 술병이 올려져 있던 걸 생각해 내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우욱..! 욱..!! 하아.." "아주 가지가지 한다, 또." 종현의 등을 두드려 주던 민호는 종현이 속을 다 비워내고 기진맥진해서 축 쳐져있자,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주었다. "혼자 씻을 수 있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종현에 민호는 미심쩍은 눈으로 종현을 보다, 종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종현의 가디건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ㅁ..뭐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봐." 가디건 단추를 다 풀러서 벗겨낸 민호는, 잔뜩 젖어서 종현의 상체에 딱 달라붙어있는 티셔츠를 위로 올려서 벗겨내었다. 당황한 종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사이, 민호는 종현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종현이 민호의 손을 꾹- 잡자, 민호가 움직임을 멈추고 인상을 쓰며 종현을 보았다. "아 왜." "ㅈ..지금 뭐..하냐니깐..?" "너 옷 벗겨주고 있잖아." "그니깐, ㅇ..왜.." "그럼 혼자 벗던가." "........?" 갑자기 일어나서 욕실을 휙 나가버리는 민호에 종현이 멍하니 문가를 보았다. 뭐..뭐야... 당황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있던 종현이 따뜻한 김이 새어 나오고 있는 욕조를 보자, 일단 씻어야 겠단 생각에 옷을 마저 벗기 시작했다. 민호가 바지 버클을 풀어놓아서 이제 벗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손에 힘이 안들어 간다는 거였다. 다리에 딱 달라붙어서 바지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종현이 안간힘을 쓰며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드로즈와 함께 골반까지만 밀려 내려가서는 다시 꼼짝도 않는 바지였다. 종현이 그냥 욕조에 들어가 버릴까.. 고민하던 차에 민호가 다시 들어왔다. "거 봐." 아직 바지도 못벗고 있는 종현을 한심하게 보던 민호가 종현에게 가까이 갔다. "혼자 벗지도 못하면서 고집은." 아.. 아아.. 대체 난 무슨 생각을 한거지.. 종현이 순간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지만 민호는 종현의 얼굴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드로즈는 그대로 두고 바지만 끝까지 내려서 완전히 벗겨내었다. 너무도 쉽게 벗겨지는 바지에 어이가 없어진 종현이었다. 종현은 이제 욕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남아있는 드로즈를 잡고 막내리던 참이었다. "야."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종현이 흠짓 올려다 보자, 민호가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말했다. "그건 나 나가고 나서 벗지?" "...아...." 순간 민호를 잊고 있던 종현이었다. 자신이 민호 앞에서 드로즈만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종현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나..나가빨리!!!" 어디서 나온 힘인지 기운차게 외치는 종현에 민호가 피식 웃으며 욕실을 나가서 문을 닫아주었다. 저렇게 생각이 없는 과외선생인데 대체 어떻게 뭘 가르치겠다는 건지.. 민호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욕실 앞을 벗어났다. 하지만.. 후다닥- 방을 벗어나자마자 민호가 급하게 달려간 곳은, 서재에 딸려있는 화장실이었다. 아래 사정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같은 남자라 해도 그렇게 다 벗은 종현을 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민호는 아까 욕실에서 본 종현의 하얀 속살..에 그만 흥분을 하고 만 것이었다. 아까도 참느라 꽤나 힘이 들었던 민호였다. 후우.. 이젠 저 과외선생 때문에 별걸 다 하는군.. 종현이 나른하게 욕조에 몸을 기대고 씻고 있을동안, 민호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저..저기.." 한참 후에 종현이 다 씻은 것인지 민호를 조심스레 불렀다. 민호는 자제하지 못할까봐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욕실 안에있는 수납장에 샤워가운 하나 있어." "아.. 고마워." 종현이 가운을 입고 나올동안 민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상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있었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했으며, 비는 여전히 그칠줄을 모르고 있었다. 종현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막막해 하고 있을차에, 민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난 다른방에서 자면 되니깐 넌 내침대 써." "응..?" 종현이 못알아듣고 되묻자, 민호가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옷도 안말랐고, 비도 계속오니깐 여기서 자고, 내일 가라고. 어차피 집에 나밖에 없어." "...알았어." 종현이 민호를 제외하곤 집에 아무도 없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조심스럽게 민호의 침대에 누웠다. 사실은 안심이 아니라 걱정을 해야할 말이었지만.. 종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춥고, 무섭고, 힘들었는데 민호와 같이 있으니 훨씬 나아진 종현이었다. 중학교때부터 홀로 서울에 올라와 힘들게 살아야 했던 종현이기에,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 편안히 기대어 있기는 처음이었다. 종현은 침대에 가득 묻어있는 민호의 체향이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 졌다고 느꼈다. 내가 민호랑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종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민호와 자신은 생각보다 많이 가까워 진 것 같다고..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무데서나 잠을 잘 자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자신의 침대에서 잠이 든 종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민호는 종현의 감은 눈을 살짝 덮고있는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런데.. 축축히 젖어있는 머리가 상당히 거슬렸다. "아픈 주제에 머리도 안말리고 자다니.." 추운데 오래 있어서 몸상태도 좋지 않으면서 머리도 안말리고 자는 종현을 보고, 민호는 한숨을 쉬며 종현에게 다가갔다. "으으.." ".......?!" 앓는...소리...? 민호는 종현의 이마에 재빨리 손을 갖다 대보았다. "......." 열이 지나치게 많이 났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많이 아픈 종현이었다. 어제 술먹고 해장은 제대로 한건가..? 민호는 일단 거실로 가서 구급상자를 꺼내와 체온계로 종현의 열을 쟀다. 38.9... 40도가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민호는 일단 물과 함께 해열제를 들고왔다. 그리고 종현을 흔들어 깨웠다. "알아나봐. 약먹고 자." "ㅇ..으... 머리..아파..." 종현이 이불을 끌어당기며 거부의사를 밝히자 민호가 이불을 휙- 걷어냈다. "약 안먹으면 더 아파." "하아.. ㅅ..싫어.." 종현이 눈도 제대로 못뜨고 싫다는 말만 반복하자 민호는 일단 해열제 한알을 꺼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만약 일어나서 약을 줘도 삼키지 못할 듯 했다. 민호가 종현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나중에 후회해도 모른다." "......." 종현은 민호가 뭐라고 하든 그저 잠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민호가 몸을 일으켜 해열제 한알을 집어들고 종현의 입안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물을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지금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호는 천천히 상체를 굽혀서 종현에게 가까이 갔다. 종현의 뜨거운 숨이 자신의 얼굴까지 닿아올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오자, 민호는 망설임없이 종현의 턱을 쥐고 입술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물을 흘려넣어주며, 혀를 이용해 알약을 목 끝까지 밀어넣어 삼키게 했다. 종현이 약을 삼키자 그제야 만족한 민호가 이번엔 수건을 들고왔다. 종현의 몸을 일으켜서 앉혀놨더니 그대로 무너져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는 종현이었다. 그러자 종현의 가운이 벌어지는 바람에 안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종현은 여전히 잠에 빠진 상태였다. 민호는 아까 욕실에서 본 것을 기억 저편으로 보내며,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본능을 참아냈다. 그리고 종현을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눕게 했다. 그런다음, 수건으로 꼼꼼히 종현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귀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민호는 꿋꿋하게 종현의 머리가 다 마를때까지 열심히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까봐 종현의 가운을 다시 꼭꼭 여며서 가운의 허리끈까지 꼼꼼히 묶어주었다. 민호는 지금껏 19년을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챙겨준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자신의 관심을 이렇게 다 쏠리게 만드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머리가 다 말라서 베게 위에 얌전히 고개를 뉘여주니. 아까부터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그제서야 풀리는 종현이었다. 민호는 손수 수건을 찬물에 적셔와서 종현의 이마에 얹어주었다. 그제서야 민호는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종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종현이 편히 잘 수 있도록 방의 불을 끄고, 붉은 빛이도는 어두운 스탠드 하나만을 켰다. 민호에겐, 부모님조차 잘 들이지 않는 자신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와 잔다는 것이 지나치게 생소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바로 종현이기에. 민호는 의자를 빼서 침대 곁으로 가져와 앉았다. 오늘은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은 밤이 될 것 같았다. # 5 "하암-" 어제 눈을 떴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개운해진 기분에 종현이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어?!" 여기가 어디지...? 익숙한 원룸이 아니라 왠 넓은 천장이 보여서 순간 당황한 종현이었다. 아.. 어제 민호 집에서 잤었지..? 그제야 어제 일을 기억해 낸 종현이었다. 종현이 그래도 낯설음을 지우지 못하고 끙차-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툭- 이마에 올려져 있었던 무언가가 아래로 툭 떨어지자, 종현이 그것을 집어들었다. 왠 수건...? 종현이 그 수건을 집어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수건을 머리고 올리고 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 아상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머리를 안말리고 자면 항상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있는데, 오늘은 머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으헉...!!"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민호였다. 종현은 깜짝놀라서 입부터 막았다. 너무 당황해서 하마터면 진짜 소리를 지를뻔 한 종현이었다. 어제 분명 다른데에서 잔다고 들었는데.. 종현이 이 어색하고 뻘쭘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금살금 기어서 민호의 킹사이즈 침대에서 막 내려왔을 때였다. "으앗..!!" 갑자기 자신의 손을 터억- 잡는 손길에 종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정작 민호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종현은 민호에게 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바둥거리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도 손목이 잡힌 적이 분명히 있었다. 얘는 왜 아무때나 손목을 턱턱 잡고 난리야..! 손목 잡는게 취미인가.. "잘.잤.어?" "ㅇ..응.."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는 민호에 종현이 왠지모를 위압감을 느껴 더듬더듬 대답했다. 하지만 민호는 종현의 대답에 별다른 말없이 고개만 대충 끄덕이고는 손을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 화장실을 먼저 쓰고 싶어서 그랬나..? 제멋대로 민호의 행동을 해석한 종현이 문득 침대옆을 보았을때, 무언가를 발견했다. 하나는 침대옆에 놓인 의자였고, 또 하나는 탁자위에 놓인 해열제와 물컵. 뭐야.. 민호가 아픈가..? 어제 밤의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종현이 무심하게 해열제를 만지작 거렸다. 분명 아까는 멀쩡해 보였는데.. 그러다 문득, 방이 서늘하다 싶었는데, 자신이 아직도 가운 한장만 입고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된 종현이었다. 민호의 방안을 둘러보던 종현은 자신의 옷과 속옷이 민호의 런닝머신에 걸쳐져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남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속옷이 남의방에 저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여긴 쪽팔리는게 아니었다. 종현은 런닝머신으로 가서 옷이 말랐는지 확인했다. 속옷은 다 말랐는데 옷은 아직 축축했다. 종현은 일단 가운 밑으로 드로즈 부터 입었다. 그리고 축축하긴 해도 티셔츠를 입기위해 가운 허리띠를 풀고 막 벗었을 때였다. 가운이 종현의 몸을 타고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지고.. "......!" 왜 하필 나와도 이런 타이밍에 나오는 건지..! 가운을 주워서 침대에 올려놓기 위해 몸을 빙글 돌리는 순간, 방금 씻고 나온 민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린 종현이었다. 오. 마이. 갓. 상황이 자신에게 조금 불리하다고 느낀 종현이었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까지 다 갖춰입은 민호가 속옷밖에 걸치고 있지 않은 종현을 향해 슬슬 걸어왔다. 민호가 자신과 눈을 똑바로 맞춘채 다가오자 종현이 저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뒤에는 런닝머신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종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민호를 쳐다보았다. 민호의 얼굴에는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아 턱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 물방울이 똑- 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종현이었다. 종현이 긴장한 눈으로 민호를 올려다 보았다. 민호가 막 씻고 나와 촉촉해진 얼굴로 종현을 한동안 마주하다가, 입꼬리를 장난스레 살짝 올리더니 곧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종현이 들고 있던 티셔츠를 빼앗았다. 민호의 몸이 점점 종현에게로 기울더니 급기야 얼굴이 서로 맞닿기 직전까지 왔다. 민호의 얼굴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종현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종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민호의 숨이 확- 닿았다. "아직, 안말랐어." "......." 후아.. 종현은 속으로 의미가 불분명한 한숨을 내쉬었다. 민호는 다행히(?) 그 한마디만 하고 다시 종현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종현이 소심하게 한쪽 눈만 슬쩍 뜨니, 민호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종현이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옷이었다. 네모 반듯하게 개켜져 있는. 종현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민호가 별 망설임 없이 바로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종현은 방문이 닫힐 때 까지 민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종현은, 자신이 이상하게 민호의 뒷모습을 자주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먼저 다가와 놓고선 미련없이 휙- 뒤돌아서 가버리는 민호였다. 종현은 정의내릴 수 없는 서운함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는 민호가 건네준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종현은 그때까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민호가 얼마나 많이 참고 있었던 건지... 종현에게 조금 큼지막한 박스티였지만, 축축한 티셔츠나 가디건보다는 훨씬 나았다. 티셔츠를 걸치고 나서, 문득 창밖을 내다본 종현이다. 종현의 기억엔 분명 어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오늘은 정말 억욱하리만치 화창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쨍쨍한 날씨에 종현이 창가로 가서 창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생각보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종현이 도로 창문을 닫았다. 비가 오고나니 확실히 추워지긴 한 날씨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듯 했다. 종현은 낙엽이 거의 다 지고 앙상한 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나뭇잎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민호 과외해서 받은 돈으로 겨울 외투나 하나 살까.. 지금 있는건 너무 오래 됬는데.. 아니, 그보다 부모님 옷을 장만해 드려야 하나..? 산골이라 벌써 한창 추울때인데.. 휭- 아까부터 종현의 시선이 머물고 있던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감과 동시에, 민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너무 자신의 생각에 너무 빠진 나머지, 종현은 민호를 보지 못했다. "후우..." "......."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깊이 잠겨있다가 간간히 한숨을 내쉬는 종현의 옆모습은 꽤나 분위기 있어보였다. 가을을 타는 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꼴에 안어울리게 가을을 탄다고 비웃어 주었겠지만, 그 사람이 바로 종현이기에 잘 어울렸다. 분위기가 차분하고, 눈빛은 멍한 듯 하나, 눈꼬리가 살짝 쳐져서 애뜻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가을과 상당히 잘 어울렸다. 의외였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민호는 종현의 입에서 나온 한숨이 방안으로 흩어질 때 쯤, 슬슬 그쪽으로 걸어갔다. 공부를 할 마음은 없었지만, '과외'를 할 의향은 충분히 있었다. 어제 못한것 까지 네시간을 빡세게(?) 수업을 해달라고 할 마음이었다. 종현이, 자신이 들어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자 민호가 종현의 어깨를 쳤다. 툭- "......." 무시하는 건가. 툭툭- "......." 어쭈. "야." "어..어?! 언제왔어..?"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돌아보는 종현이었다. 무슨생각을 얼마나 골똘히 하고있었길래 사람이 쳐도 모르냐. "뭐하냐?" "어..? 아무것도.." "수업 안하냐?" "수업..? 해..야지!" 언제 진지했냐는 듯 금새 발랄한 표정을 짓고선 대답하는 종현이 신기하기까지한 민호였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신기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화장실에서 사람을 찾질않나,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지를 않나, 미련하게 비를 맞고 서있질 않나, 남이 보는 앞에서 옷을 막 벗... 이건 좀 야한 장면이므로 통과- 아무튼, 종현은 하는 행동뿐 아니라 생긴것도 신기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분위기라 강아지 같기도 한데, 화내서 눈꼬리가 샐쭉 올라가면 고양이가 되기도 하고.. 또 생긴것 답게 목소리 마저도 독특했다. 마른 몸중 유일하게 통통한 붉은 입술을 통해서, 허스키한 듯 하면서도 조금 높고도 부드러운 미성이 흘러나오면 새삼 감탄하기도 한다. 결국, 결론은.. 종현은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라고 내린 민호였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해야하나 저걸.. "저기.. 민호야..?" 종현으로선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자신을 뜯어보며 불카를 쏘는데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자. 수업." "ㅇ..어..어어..! 하자.. 수업." 종현이 허둥허둥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들어올려, 열어서 책을꺼냈다. 민호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갑자기 울상을 짓고 자신을 빼꼼 올려다 본 종현과 다시 눈이 딱 마주쳤다. "헝.. 민호야.. 책이 다 젖었어." "쯧. 어제 그렇게 무식하게 비를 맞다니만.."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냥 해. 글씨는 보이잖아." "..알았어.." 아니, 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종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학생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말릴 선생이 어디에 있을까.. 재빨리 수업준비를 하는 종현이었다. 민호는 그동안 슬슬 탁자에 와서 앉았다. "오늘은 수업 여기서 하자." "그래!" 종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금새 대답했다. 햇빛이 잘 들어서 그런지, 책상보다 테이블이 훨씬 더 밝았다. 종현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흥얼거리며 책을 폈다. 종현이 수학문제집을 펴서 수업할 부분을 찾아 넘길동안, 민호는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앉아서 4시간동안 종현의 목소리를 감상할 준비를 했다. 그나저나.. 정말 박스티를 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 민호였다. 새하얀 박스티가 종현에게 너무 잘 어울리기도 했으며, 길이가 허벅지 중간까지 와서, 앉으면.. 제법 볼만했다. 그런데 저번에도 느낀거지만, 종현이 너무 말랐다고 생각한 민호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자가 여자마냥 저렇게 뽀얗고 얇아서야 원.. "찾았다. 자, 이제 시작하자! 오늘은 미적분을 할차례네..? 여기 많이 아려울텐데..(특히 너한텐.)" "하암- 근데." "아...,아냐! 계속 하다보면 쉬워져." "그럼 빨리 하던가." "알았어! 먼저, 개념 설명부터 하자면........" 꼬르르륵- "......." "......." 잠시 아무말도 없어진 두 사람이었다. 종현이 민호의 눈치를 살피고.. 민호는 그저 무표정으로 있을 뿐이다. 잠시후.. "미안해.." "실례." 동시에 말을 꺼낸 그들이었다. 종현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민호를 보았고, 민호 역시 황당하다는 듯 종현을 보았다. "민호야, 설마 너도.." "그럼, 너도?" 잠시 정적이 흐르고..... "푸흡.. 푸하하하!!!!!" "푸흐.. 하하하!!!-"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 그들이었다. 그렇다. 둘은 뱃속시계가 동시에 울린 것이었다. 한참을 웃던 중, 민호가 먼저 정색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종현은 너무 웃는 바람에, 눈물까지 찔끔 나서 손가락으로 닦으며 민호를 올려다 보았다. "어디가?" "기다려. 먹을 거 있나보게." "응.." 민호는 방문을 나서자마자 다시 터져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았다. 나 참.. 타이밍도 정말 기가막히네.. 민호가 나가고.. 종현은 한참 웃고난 뒤에 혼자 남은것이 뻘쭘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역시 최민호라 해도, 배꼽시계는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나와." 얼마 안있어서, 민호가 방으로 다시 돌아와서 종현을 향해 말했다. 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서 일층으로 내려가는 민호를 뒤따라 갔다. 부엌쪽으로 가면 갈수록 익숙하고 한국적인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설마.. 라면...?! "할 줄 아는게 이거밖에 없으니깐 그냥 먹어." "잘.. 먹을께." 종현은 민호의 맞은편에 앉아서 적당히 익은 면을 집어올렸다. 부잣집 아들도 라면을 먹긴 먹는구나.. 맨날 스테이크라던가 고급스런 음식을 먹는 줄 알았는데. 종현은 젓가락을 든 채, 민호가 라면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갑자기 민호가 자신의 그릇을 젓가락으로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멍해지던 정신을 잡았다. 툭- ".......?" "먹는데 집중해." "아.. 응." 민호의 말에 그릇에 코를 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이고 라면을 먹는 종현이더랬다.. "잘먹었어!" "어." "너 라면 무지 잘 끓인다~" "..어." 무미건조한 민호의 반응에 종현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으면 민호는 종현 모르게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종현의 입가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민호였다. "기다려봐." "......?" 민호는 일어서서 휴지를 가져와서는 종현의 입가를 손수 닦아주었다. 종현은 조금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앞에 서있는 민호의 가슴팎만 쳐다보았다. 민호는 됐다- 라고 하고는 숙였던 상체를 다시 피고는 그릇들을 대충 치웠다. 종현은 여전히 얼굴을 붉힌채로 시선을 가만히 못두고 있었다. 민호는 자꾸만 종현을 챙겨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챙겨주고 싶거나 도와주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자신이 뭔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는 민호였다. 민호는 이제 올라가자고 하기위해 종현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하얀 얼굴에 비해 유난히 빨개진 종현의 입술이 상당히 눈에 띄어서 조금(?) 곤혼스러웠다. 요새 자꾸 종현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반응이 오는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민호는 먼저 앞서가며 말했다. "올라가자." "어어.." 종현도 멍하니 앉아서 손장난 치던것을 멈추고 민호를 뒤따라 갔다. "좋아! 이제 진짜 수업하자!" "어." 민호는 종현이 붉은 입술을 열심히 조물거리며 설명하는 모양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종현은 민호가 자신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서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수업을 해야하므로 내색을 안하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ㅈ.. 저기.." "뭐." "우리.. 너무 가깝지 않니..?" "......." 민호는 무의식중에, 편안히 의자에 기대어 놓았던 몸이 점점 앞으로 가더니, 테이블에 상체를 받치고 있다가, 급기야 종현을 향해 상당히 앞으로 숙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민망했는지, 상체를 도로 뒤로빼며 크흠- 헛기침을 하는 민호였다. "아. 미안. 수업에 너무 집중했나." 그건 아닌것 같은데.. 종현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하던 설명을 마저 했다. 민호는 또다시 자신의 몸이 종현쪽으로 기울어 가는 것도 모르고 종현에게만 집중했다. "끝! 오늘은 여기까지." "벌써 끝났어?" "벌써라니..! 지금 시간이 몇신데!" "......." 종현의 말에 시계를 본 민호는 할말이 없어졌다. 별로 수업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4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니.. 반면에 종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얼굴 뚫리는 줄 알았네.. 종현이 안도하고 있는데, 민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야, 너 폰줘봐." "폰..? 아.. 그게.. 폰이 물을 잔뜩 먹어서 고장났어." "그럼, 폰 없어?" "으응.. 근데, 곧 살꺼야." "..그럼 손줘봐." "...어?" 민호의 말에 종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되물었다. 소.. 손..? 손을 줘보라니.. 대체 왜..?! 종현이 민호만 멀뚱멀뚱 쳐다보자, 답답했던 민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종현을 향해 손을 내밀고는 말했다. "손, 줘보라고." 종현은 그 위협적인 말투에 하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민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민호가 그제서야 씨익- 웃으며 종현의 손을 자시니 가까이로 확- 끌어당겼다. "으헉?!" 뭐..뭐야..!! 종현은, 테이블 반대편에 마주하고 있던 민호가 손을 당기는 바람에 몸이 그쪽으로 딸려가다가, 배가 테이블에 걸리는 바람에 저절로 억- 소리가 났다. 속으로 자신의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았기를 바라는 종현의 속도 모른채, 민호는 느긋하게 옆에있던 종현의 필통에서 아무 펜이나 꺼내왔다. "ㄴ..너어..!" 지금, 내손에 대체 무슨짓을 하려는 거야..!!! 종현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민호는 가차없이 두터운 펜 뚜껑을 열더니, 종현의 손바닥으로 가져갔다. 종현은 검은색의 두꺼운 펜의 끝이 자신의 손바닥으로 향하고 있는것을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 닿는다... 닿는다아....!! 닿았다!!!!! "악- 간지러워!" 종현이 간지러워서 손바닥을 확- 움츠리려 하자, 민호가 종현의 손을 더 단단히 붙잡고는 무언가를 써내려 갔다. 종현은 간질거리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민호가 손을 너무 꽉- 쥐고있는 바람에 손가락만 꼬물꼬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됐다." 민호가 손을 놓아주자마자, 종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확인했다. 손바닥에는 검고 두꺼운 몇개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010, XXXX, 1209...?" "내 번호야. 폰사면 저장하라고." "알았어.." 종현이 손바닥에 씌여진 숫자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글씨체가 자신과는 다르게 꽤나 깔끔하고도 정갈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거 네임펜이거든..?! 어떻게 지우라고..!! 종현은 네임펜을 지울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민호는 그런 종현의 속도 모른채 무언가 아쉬움이 묻어있는 얼굴로 물었다. "데려다줄까?" "ㅇ...엉?" "바이크로 데려다 준다고." "아..아냐! 괜찮아! 난 다른데 들릴데가 있어서.. 옷도 거의 다 말랐으니깐 그냥 갈께." "그럼, 그러던지." 민호는 말을 끝내자 마자, 탁자를 짚고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민호가 바로 나가버리자, 자신이 거절해서 민호의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종현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자신이 무슨말로 종현을 붙잡을지 몰라서 서둘러 나갔을 뿐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종현은 걱정이 한가득 담긴 얼굴로 민호가 나간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냥 데려다 달라고 할껄 그랬나... "나 갈께." "어." "옷은 얼마 입고 있지도 않아서 그냥 옆에 개놨어." "..어." "그..럼 진짜 갈께! 복습 해야돼..!" "어, 가라." 종현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의식하고는 뻣뻣한 동작으로 민호네 집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종현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민호네 집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아니, 거의 뛰다싶이 갔다. 그리고 대문밖까지 나가자마자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자꾸만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바람에 어지러웠다. 종현은 뛰어서 그런거라고 대충 넘겨버리고는 조금 여유있어진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가서 아무 생각도 안하고 푹- 쉬고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후우.." 고작 하루밖에 있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종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민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직 종현의 체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종현이 입었던 박스티가 서툴게 개켜져 있었다. 은근히 이런면에서 꼼꼼하지 못한 듯 했다. 민호는 종현이 악필이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해 내며 혼자 풋- 하고 웃었다. 즐거웠다. 김종현과 과외를 하는 것은. 그동안 해왔던 수많은 고액 과외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민호가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특정한 시간을 애타게 기다려 본적이 없었는데, 종현과의 과외시간은 기다려졌다. 주말만 수업하는게 이니라 매일 하고싶을 만큼.. 기대가 되었다. 다음엔 종현과 또 어떤 일이 생길지.. 털썩-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자로 뻗어버린 종현은 씻을 생각도 안하고 그대로 옆에있는 이불을 질질 끌고왔다. "아- 살것같다. 역시 집이 편하다니깐~" 눈을 감고 편안하게 누워있던 종현은 조금 뒤에,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내일까지 보고서 초안 작성해야 하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할일은 해야하는 법. 이것이 종현이 독립해서 살면서 얻어낸 삶의 방식이었다. 종현은 의지의 한국인답게 피곤함 따위는 저편으로 몰아낸 채, 노트북을 켰다. 이렇게 바쁜데 여유나 부리고 있었다니.. 종현은 자신을 질책하며 열심히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다. # 6 밤을 꼬박 새워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종현은 다크써클이 턱끝까지 내려온 느낌을 팍팍- 받았다. 주말동안 이틀에 걸쳐 해야하는 것을 예상치 못한 변수로 하루만에 해버렸으니.. 조금 무리였긴 했다. 그래도 민호의 집에서 푹 자서 그런건지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고, 피곤하면서도 왠지모를 들뜬 기분에 졸지 않고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종현은 보고서 초안을 제출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점심을 위해 교내 식당으로 들어섰다. 두시에 전공강의가 있어서 빨리 먹고 예습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뭐먹지... 종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곧 한 메뉴가 눈에 띄었다. 평소에 즐겨먹진 않지만.. 오늘은 왠지 먹고싶었다. 종현은 햇빛이 잘 드는 테이블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내려놓고는,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실내라 따뜻했지만, 날씨가 춥다보니 햇빛만 찾는 것이 그새 습관이 되었다 보다. 종현은 뜨거운 라면 국물을 한숟갈 떠먹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어제 민호랑 수업할 때도 창가 옆 테이블에서 했는데.. 종현은 자신이 멍해질때 자꾸만 민호생각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멍하니 주말의 기억들을 더듬었다. 턱- 종현은 자신의 어깨를 누군가가 치자 깜짝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있는 진기가 보였다. 종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금 크게 말했다. "서..선배! 깜짝 놀랐잖아요!" "놀라기는. 혼자 먹는거야?" "네. 빨리 먹고 도서관 가려구요." "열심히 하네. 기특하다-" 진기가 종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옆에 앉았다. 종현은 진기가 아무것도 들고있지 않은게 이상해서 물었다. "선배는 점심 안드세요?" "아, 나 먹었어. 종현이가 심심해 보이길래 왔지." 딱히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앞에서 방긋웃고있는 진기에게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종현은 그저 미소만 지어주고는 점심을 마저 먹었다. 라면맛이 어제보다 못한것 같았다. 그래.. 어젠 배가 많이 고팠었으니깐 더 맛있게 느껴졌었겠지.. 종현은 대충 생각을 넘기고는 라면을 열심히 먹었다. 진기가 자신의 맛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도 못본채.. "아- 잘 먹었다." "너 라면 진짜 맛있게 먹는다." "아.. 그래요..?" 종현은 멋쩍게 웃으며 빈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진기도 따라 일어섰다. "도서관 바로 갈꺼지? 나도 그 근처 가니깐 같이가자." "네, 선배." 찬 바람을 맞으며 진기와 종현은 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진기는 앞만 보고 가는 종현을 흘끔 보다가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주말동안.. 무슨일 있었어?" "...네?! 무슨일이요?" 깜짝 놀라며 필요이상으로 과한 반응을 보인 종현에, 진기는 조금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일 있었구나 너. 그냥 주말 내내 연락이 안되길래." "아.. 핸드폰이 고장나서요.." "고장..? 네 핸드폰 멀쩡했잖아." "그게.. 물이 안에 들어가는 바람에 고장이 났어요." "저런. 조심좀 하지. 그럼 언제 고칠꺼야?" "산지 오래됐기도 하고 그래서 새로 하나 장만하려구요." 종현의 말에 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좀 구형이긴 했지." "네.. 근데, 주말엔 무슨일로..?" "아, 술 마시고 잘 들어갔나 해서." "아.." "게다가, 주말엔 너가 그렇게 걱정하던 과외도 있고 그러니깐, 나도 걱정이 되서 연락 해봤지." "아.. 별일 없었.." "......?" 종현은 말을 하다 멈추었다. 민호를 기다리느라 비를 한참 동안 맞고, 아파서 집에도 못가고 민호네 집에서 하룻밤 잤으며, 그밖에도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는데, 별일 아닌게 맞나..? 하지만, 그래도 그 많을 일들을 모두 진기에게 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종현은 급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과외 무사히 잘 했어요. 민호랑 이제 좀 친해져서 괜찮아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갈께요! 안녕히 가세요 선배..!" "어..어어. 그래, 잘가!" ......? 진기는 종현의 말 어딘가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분명히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과외였고, 불과 몇일전만 해도 과외하기 무섭고 힘이든다고 했었던 종현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종현은 이미 도서관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후였기에 다시 따라가서 묻기도 좀 그랬다. 진기는 찜찜하긴 했지만, 별수없이 발걸음을 돌릴수 밖에 없었다. . . . "어서오세요~" 직원의 활기찬 인사를 받으며 종현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에서 핸드폰들이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때 부터 그다지 넉넉하지 않게 자랐으며,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 인지라 이렇게 무언가를 살때면 조금 위축된 기분이 들곤 하는 종현이었다. 그런 종현의 속을 모르는 직원은 신이나서 떠들어댔다. "폰 바꾸시게요?" "네? 아..네. 전에 것이 고장이나서 이번에 새로하나 장만하려구요." "그러셨군요~ 그럼 스마트 폰으로 하실꺼죠?! 요새는 다들 스마트폰을 쓰잖아요~" "그..런가요?" "그럼요~" 직원은 이것저것을 꺼내와서 종현의 앞에있는 테이블에 진열을 해놓았다. 그리고 각각의 특성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은 생각도 안해봤는데.. 종현은 열심히 설명하고있는 직원의 말을 끊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근데, 보통 요금은 얼마나 하나요?" "아~ 요금 별로 비싸지 않답니다! 기본요금은 대략 6만원 정도 해요." 별로.. 안비싸다고?! 종현은 기겁을 했다. 자신이 쓰던 폰은 아무리 많이 써도 3만원 안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폰을 거의 시계용으로만 썼던 까닭도 있지만.. 종현은 고민에 빠졌다. 고작 핸드폰따위(?) 때문에 한달에 6만원씩 내기는 아까우니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금이 너무 비싸서 못쓰겠다고는 못하겠는데.. 종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금제 가장 싼 것이 뭔가요?" "가장 싼 것은.. 이게 좋겠네요! 요금이 굉장히 저렴하면서도 기능도 괜찮거든요~" "그래요?" "네! 요금은 한달에 4만원밖에 안해요~ 그리고 신빛꺼라 그런지 기능도 무척 다양하고 괜찮아요!" 신빛...?! 종현은 신빛그룹이란 말에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곧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렇지.. 신빛그룹은 단순히 민호네 아버지 회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그룹이였지.. 종현은 새삼 민호와 자신 사이에 거리감을 느꼈다. 그래도 요샌 꽤 친해진 줄 알았는데.. 종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직원을 향해 말했다. "그럼.. 그럴로 할께요.." 종현의 말에 직원이 사용법을 친절히 알려주는데, 종현의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어딘가가 꽉 막힌 기분이랄까.. 핸드폰을 사고 돌아와서 종현이 가장먼저 한 일은, 민호의 번호를 등록하는 것이었다. 민호는 자신이 학생이라는 것을 좀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종현은 '민호학생'이라고 저장을 하고는 흡족하게 핸드폰을 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아직까지 다 지워지지 않은 네임펜 자국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씩씩거렸다. "자- 최민호! 너가 바라던데로 네 번호 친절히 저장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 손에 네임펜으로 쓰냐?!" 종현이 아무리 자신의 집에서 외친다 한들 멀리 떨어져 있는 민호에게 들릴리가 만무할.. -ㅋㅋㅋㅋㅋ... 줄 알았으나.. 종현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잠시 떨어야 했다. 그리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려서 간신히 핸드폰을 눈앞까지 들어 올리니.. 오. 마이. 갓. 어째서.. 화면엔 '민호학생-통화중 00:15'라는 문구가 떠있으며, 숫자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는 것인가..! 종현은 뻣뻣함 그 자체로 딱딱 끊어지는 동작으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그러면 더 선명하게 들리는 웃음소리.. -푸흑- 푸하하하!! 하하하- 하.. 큭큭.. 숨넘어갈 정도로 격렬하게 웃는 민호의 목소리에 종현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여..보..세요..? 민호니...?" -하하하ㅎ... 네임펜, 으로, 낙서한게, 그렇게 억울했냐? 웃음을 참느라 말도 뚝뚝 끊기는 민호에, 종현은 소리를 빽- 질렀다. "시..시끄러워!!! 암튼, 이거 내 번호니깐 너도 저장해!! 수업 빠질일 있으면 미리 연락하고! 알았어?!" -풉.. 어. 푸하하..! 뚝-!! 종현은 민호가 또 웃음을 터뜨리자, 가차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씨이.. 스마트폰이라 똑똑한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전화연결이나 되고.. 이거 완전 바보폰이구만?! 종현은 애꿎은 핸드폰에게 화풀이를 했다. 반면에.. 민호는 전화가 끊어졌음에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하하! 아- 귀여워 미치겠다- 큭큭.." 이렇게 민호의 웃음소리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 . . 영원히 오지 않길 바랬던 주말이 금새 훅- 다가와 버렸다. 종현은 민호네 집으로 걸어가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들어가자마자 놀릴까? 아님, 그냥 비웃을까.. 아냐, 혹시몰라. 그 일을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하지만, 폰을 산지 고작 몇일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벌써 잊을리 만무했다. 결국 종현은 걱정은 다 덮어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이 모르겠다- 놀리면 놀리는거고. 언제는 최민호가 날 안 무시했었나. 에휴.. 김종현.. 너 언제 이렇게 됬니.. 생각해보니 자신의 처지가 참 서러운 종현이었다. 과외하는 학생한테 무시나 받으며 살다니.. 물론 그 학생이 자그마치 신빛그룹의 막내아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띵동- 한숨을 내쉬며 초인종을 누른 종현은 이젠 제법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만에 보는 아주머니가... 아니라.. 처음보는 아주머니가..? 종현이 어리둥절 하다가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새로오신 민호 과외선생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저는 민호 엄마에요. 선생님이 생각보다 어리게 생기셨네?" "아.. 감사합니다. 하하. 그럼, 저는 올라가보겠습니다." "그러세요. 민호는 방에 있을거에요." "네." "아, 그리고 민호 수능날이 얼마 안남았거든요." "아... 네?!" "수능이요. 그래도 수능은 봐야하니깐 적어도 중간은 하도록 잘 가르쳐 주세요." "....네." 종현이 고개를 한번 숙이고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괜시리 긴장이 되어서, 다리가 덜덜 떨리지 않게 힘을 팍팍주고 걷는 종현이었다. 민호네 어머니는 실제로 처음보지만, 신문이나 TV에서 가끔 볼 수 있던 분이라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하지만.. 그만큼 거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민호의 수능까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무감까지 들어서 부담이 배가 되었다. 종현이 여전히 힘이 가득 들어간 다리를 이끌고 민호의 방으로 갔다. 예의상 노크를 두어번 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간 종현은, 왠일인지 책상에 앉아있는 민호를 볼 수 있었다. 어라? 검은 뿔테까지..? 민호는 안경까지 쓰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읽고있었다. 종현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 민호옆으로 걸어갔다. "저.. 안녕."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낀건지 민호가 고개를 들고 종현을 보았다. 종현이 인사를 하느라 어색하게 들었던 손을 슬쩍 내려서 자신의 가방을 붙잡자, 민호가 말했다. "뭐해. 빨리 앉아. 수업 안해?" "어, 어어.. 해!" 어머니가 계셔서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평소보단 사뭇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종현이 오늘따라 특히 더 진지해진 민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져서 중간중간 민호에게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켰다. 그러면, 그제서야 민호가 자신한테서 눈을 떼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반쯤 흘렀을까.. 종현이 민호에게 문제를 풀으라고 시킨지 몇분 지났을 때였다. "다풀었어." 종현이 잠시 다른생각을 하느라 민호의 말을 못 듣자, 민호가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 "야- 다 풀었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들린 노크소리에 종현도 민호도 흠짓- 하고 놀랐다. 종현이 정신을 차리고 문쪽을 보자, 민호의 어머니가 과일과 쥬스등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오시는 중이었다. "드시면서 수업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리고 민호 너." 어머니의 부름에 민호가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 풀고는 올려다 보았다. "왜요." "너 선생님한테 야가 뭐니? 아무리 나이차이가 별로 안난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인데,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지." "......." "이제부터 존댓말을 쓰도록 해. 알았니?" "...네." 한눈에 봐도 억지로 대답한 것이 티나는 민호였다. 종현은 속으로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생님인데..! 민호 어머니가 그럼 수업 마저 하세요- 라며 나가시고.. 민호는 그제서야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거봐. 이제 나한테 존댓말 써야된다?" "시끄러."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는 얼굴로 조용히 말하는 민호에 종현은 또 찍소리도 못하고 얌전히 수업을 해야만 했다. 결국 민호한테서 존댓말을 듣는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수업이 다 끝나갈 무렵, 종현이 문득 생각난게 있어서 민호에게 물었다. "너 모의고사 보면 보통 몇등급나와..?" "한.. 2등급?" "뭐?!" 그럼 엄청 잘하는건데..! 김기범이 설마 거짓말을..!! 종현이 놀라서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민호가 덧붙였다. "뒤에서." 그럼 그렇지.. 종현이 요즘들어 한숨을 많이 쉰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다 말고는 말했다. "그럼, 일단 내가 가르치는게 수학이니깐, 수학을 중점으로 하는데, 다른과목도 봐줄테니깐, 공부 꼭 해야돼! 알았지..?" "어." "대답은 잘하지. 그럼.. 뒤에서 2등급이면.. 치.. 칠등급..?" "잘 아네." "민호야."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며 민호를 쳐다보는 종현에, 민호가 조금 당황하며 종현을 보았다. "따악- 2등급만 더 올려서 5등급 받으면, 중간은 되는거니깐..! 만약 4개 과목 전부 5등급 안에 들면, 내가 좋은거 줄께!" "좋은거?" 그제서야 관심을 보이는 민호에, 종현이 기뻐하며 말했다. "응! 좋은거! 대신, 못하면 너가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기.ㅎㅅㅎ" "뭐? 말이되는 소리를 해라." ".....싫어? 그럼 5등급안에 다 들면 되잖아.." 거의 울것같은 얼굴로 말하는 종현에, 민호가 잠시 고민을 하다 말했다. "알았어. 콜." "콜?! 진짜지?! 좋아..! 우리 열심히 해보자..!" 혼자 방방 뛰며 좋아하는 종현을 보며 민호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어? 자게?" "어. 수업 끝났잖아." "아.. 그래. 잘자..!" 종현이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조용 걸어서 착하게 불까지 꺼주고 나가자, 민호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여간.. 웃기는 선생이라니깐. 한편, 종현은 민호네 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다행이 네임펜 사건은 무사히 지나갔다고.. 어찌됐건 종현은, 수업이 끝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민호네 집 골목을 힘차게 걸어갔다. 그 때 였다. "과외선생..?" 때마침 그쪽에서 담배를 피고있던 태민이 종현을 발견했다. 종현은 태민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태민은 종현의 뒷모습을 보다 담배를 신발로 지져서 껐다. 전부터 항상 궁금했었다. 저 과외선생의 정체를. 알게모르게, 아니, 확실히 민호가 저 과외선생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근들어선 무슨일이 있어도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에는 시간은 비워놓는 민호였다. 태민은 민호의 옆에 꽤나 오래 붙어있었지만, 민호의 이런모습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번에 자신이 그렇게 잘 따르던 규현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까지 토요일 두시는 비워두어야 된다고 했던 민호였다. 그렇다면, 설마.. 최민호가.. 저 괴외선생을.. # 7 "여보세요." -종현아! "아, 진기 선배. 무슨 일이에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 해야돼? "아..아뇨..! 그건 아니구요.." -하하. 농담이야. 그나저나 스마트폰으로 바꿨다면서? "네. 근데 생각보다 불편하더라구요." -원래 처음 쓸 땐 다 그래. 나도 그랬거든.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 과 모임 있는거 안잊었지? "...아, 깜빡했어요..! 몇시까지에요?" -으이그. 그럴줄 알았다. 8시까지니깐 여유는 있을꺼야. 장소는 동아리 실 하나 빌려서 하기로 했어. "동아리실이요..?" -응. 간단하게 할껀가봐. "아.. 알았어요. 고마워요 선배." -뭘. 그럼 끊는다. "네. 이따 봬요!" -뚝 전화는 가볍게 끊겼지만, 종현의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과 모임만 있다하면, 예외없이 술을 떡이 되도록 마셔야 하니 그럴만도 했다. 종현은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볼을 잔뜩 부풀려서 불만을 표현했다. "아니, 대체 학과 선배들은 왜 나한테만 술을 다 몰아주냐구..! 모임만 있다하면 술판이라니.. 사회교육과가 이래도 되는거야?!" Y대학 사회교육과 1학년에 재학중인 종현의 불만이 드디어 터졌다. 종현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번엔 술을 몰래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필름이 끊길때 까지는 마시지 않겠다고.. 술만 마셨다 하면, 감수성이 평소의 몇배는 더 풍부해져서 그야말로 수도꼭지 처럼 펑펑우는 자신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거기다가 했던말을 또하고, 또하는 주정까지..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눈 찌푸릴 만한 주사였겠지만, 그것을 종현이 한다면 여간 귀엽고 재밌는게 아니었다. 그걸 아는 과 선배들은 다들 짜고 종현에게만 술을 몰아주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종현이 그것을 알리는 없지만.. 그래서 자주 필름이 끊기는 종현이었다. 필름이 끊긴다는 것은 비단, 종현 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참 찝찝한 일이었다. 특히나 종현은, 자신이 술에 잔뜩 취하면 진기가 자신을 다 챙겨준다는 것을 알기에 미안함이 더 컸다. 그래서 이번엔 진기에게 또다시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속으로 여러번 다짐했다. 주량이 그리 센편은 아닌 종현이 과연 그 다짐을 지킬 수 있을진 미지수였지만.. "와..." 과모임을 한다는 동아리실에 들어선 종현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벌써 먹을 것들이 잔뜩 있었으며, 꽤나 일찍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도 거의 다 되어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건... 아마 툭 치면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술병들이 아닐까 싶다. 종현은 당장에 저 술병들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뒷일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기에, 술병들을 애써 무시하고 자신도 준비하는 것을 거들었다. 차츰차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꽤 많은 인원이 모였을때 자연스레 술판이 벌어졌다. 진기가 종현을 걱정스레 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종현의 옆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엔 왠일인지 종현의 양 옆사람이 종현에게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기는 종현의 옆에 앉은 자신의 동기인 시원을 향해 말했다. "형. 미안한데, 비켜주면 안될까?" "야- 이진기! 넌 왜 맨날 김종현 옆에만 앉냐? 오늘은 거기 앉아." "하지만.." "선배, 그냥 거기 앉아요." 걱정 된다는 표정의 진기였지만, 종현은 괜찮다는 듯이 한번 웃어보였다. 할 수 없이 진기는 종현의 오른쪽에 앉은 시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 그 둘은 사악한 미소가 번지고 있는 시원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종현은 진기에겐 웃어보였지만, 속으로는 걱정 투성이었다. 내일 과외도 있는데.. 과연 멀쩡한 모습으로 민호를 볼 수 있을지는 자신도 의문이었다. 서로서로 얘기를 하며 한창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우렁찬 목소리가 동아리실을 울렸다. "자자- 우리 심심한데, 게임이나 할까?!" "우와!!!" "좋아요-" "무슨 게임 할까요?" 3학년 과대표 동해의 말에 다들 적당히 취했는지, 호응을 상당히 크게 해주었다. 종현은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바람에 긴장을 바싹 했다. 술고래가 될 위기에 처해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명언을 뼈속 깊이 새기는 종현이었다. 첫 게임은 가볍고도 진부한 공공칠빵 게임이였다. 시작은 당연 동해였다. 가장 연장자인데다가, 과대표이시기 때문이다. "공!" "공!" "칠!" 누군가 칠을 하자, 실내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빵!" "으악!" "으악!" "으..아..!" '으악'은 분명 두명만 해야 하는데, 세명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들 고개를 돌려서 그 잘못된 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하하.. 걸렸네.." 그는 바로, 종현과 진기의 사이에 앉은 시원이었다. 다들 그를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몇몇이 신이나서 벌칙주를 만들고 있는데, 동해가 입을 열었다. "벌칙주는 양 옆사람이 대신 마시기~" "자..잠시만요..!!" "그런게 어디있어!" 동해의 말에 종현과 진기가 동시에 발끈해서 외쳤다. 하지만, 동해는 실실 웃으며 벌칙주를 두개 만들라고 시키는 중이었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두개를 만드는 중이었다. 진기는 뭔가가 심히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젠 진기도 같이 벌칙주를 마셔야 하므로 종현의 흑기사를 해줄수가 없게 된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꼼짝없이 벌칙주를 다 마시게 된 종현이었다.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비롯해 탄산음료와 이것저것을 섞은 벌칙주를 받아든 종현의 눈은 공포 그 자체였다. "빨리 마셔! 원샷 못하면 한잔 더 마셔야 되는거 알지?!" 진기가 먼저 그 벌주를 들이키고, 종현도 이어서 눈을 꾹 감고 마시기 시작했다. 올라올뻔 한 것을 겨우겨우 다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니, 얄입게도 바로 게임을 이어가는 동해였다. "자자- 다음게임-!!" 그 뒤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서 연출되었다. 어떠한 게임이 진행되든, 걸리는 사람은 대부분 시원이었고 벌칙주를 마시는 것은 진기와 종현이 되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진기와 종현을 비롯해, 모두들 눈이 풀리고 혀가 꼬여가고 있었다. . . . 땅-!! 데구르르- 공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하얀공이 대굴대굴 구르다 어느 한곳에 멈춰선다. 민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태민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맥주 줘 봐." "술을 마시니깐 자꾸 빗나가잖아요." "좋은말로 할때 그냥 줘." "......." 태민이 할 수 없이 민호에게 맥주를 건냈다. 상대팀과 꽤나 점수차를 벌여서 앞서나가고 있는데, 민호가 자꾸만 예상치 못한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점수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상대팀이 칠 동안, 민호는 반캔정도 남아있는 맥주를 다 마셔버리고는 다시 큐대를 잡았다. 큐에 초크를 얇게 펴바르며, 민호는 특유의 불카로 당구공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땅!! "끝." 민호의 목소리가 게임이 끝났음을 알렸다. 상대팀이었던 민호의 학교 선배들은 점수판을 보더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큐대를 놓으러 가다가 다시 민호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최민호- 마지막으로 포켓볼 한번만 치고 가면 안되냐?" "됐어. 이번에도 우리가 이기면 그냥 조용히 가기로 했었던거 기억안나?" "야- 솔직히 너네한테 사구를 어떻게 이기냐.. 그러지말고 포켓볼 한번만 치고 가자. 술은 내가 살게." "후..." 술기운이 조금 올랐는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빨리 집에 가고싶었만, 선배들의 부탁에 할 수 없이 이미 걸어놓았던 큐대를 다시 잡았다. 귀찮긴 했지만, 이렇게 몇시간동안 당구를 치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기에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치고 가시게요?" "어." "그럼 전 먼저 들어가볼께요." "저런 싸가지 없는..!" "놔둬 그냥. 들어가봐." 태민이 지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간다고 하자, 민호의 선배가 발끈했다. 여기서 나이도 가장 어리면서 민호에게 함부로 대하는 태민이 못마땅한 민호의 선배였다. 그리고 민호도 그것에 대해 별다른 저지가 없어서 더 열이 받는 그였다. 태민이 고개를 까딱하고 나서, 당구장을 먼저 나서고 민호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십분 쉬었다가 하자는 말에 민호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담배 연기를 내밷었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밤 12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일 과외있는데.." 무심코 내밷은 민호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보는 눈이 있었다. "니가 언제부터 공부에 극성이었다고-" 선배의 말에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민호는 맥주 한캔을 더 따며 말했다. "그냥 해본 말이야. 포켓볼이든 뭐든 할꺼면 빨리 시작해. 피곤하니깐." "어..어어. 그럼 바로 시작하자." 당구장 실내는 다시 공맞추는 소리와 공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어찼다. 더불어 담배 연기까지. . . . "선배애.." "..으음..." "선배..! 일어나요오.." "......." 종현이 열심히 흔들었지만, 진기는 이미 뻗어서 정신을 차릴 기미도 안보였다. 주량이 꽤 센편인 진기마저 뻗은 상황에서 종현이 깨어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같은 일이었다. 종현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그냥 동아리실에서 잘 생각인지 다들 뻗어있었다. 몇몇 깨어있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은 모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로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종현은 아까 한차례 대성통곡을 한 뒤라 머리가 심히 울렸지만, 일단은 벌떡 일어섰다. 헤롱거리긴 했지만, 용케도 내일 과외가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은 종현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아~ 안녕히 계세요!" 엉뚱하게 벽에다 대고 꾸벅 고개를 숙인 종현은, 처음으로 진기의 도움없이 술자리를 홀로 빠져나왔다. "조오아..!! 나도 혼자 갈 수 있다, 이거야아!!" 밤 늦은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게 오히려 다행일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종현을 본다면 틀림없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볼테니깐. 물론 현재로선, 99%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종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들.. "우웁...!" 기는 커녕, 오히려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속이 뒤집히고 만 종현이었다. 그래도 환경을 오염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아낸 종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단은 집까지 무사히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발걸음이 빨라지는 대신, 발이 꼬이는 바람에, 철푸덕- 소리를 내며 엎어진 종현이었다. "아야..! 아파.. 헝.. 사나이는 울면 안되는데에.." 까진 무릎을 호호 불다가 다시 벌떡 일어선 종현은 씩씩하게(흐느적 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모른채. 한편, 민호는 포켓볼까지 이기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당구장에서 나와 집으로 가고 있었다. 캔맥주를 많이 마신탓에 술기운이 조금은 올라왔지만, 그다지 많이 취하지는 않은 민호였다. 민호는 전화로 집에 잘 들어가라는 선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깔끔히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데.. "......!"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뻔 한 민호였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의 코너를 돌자마자 바로 벽에 기대어 있는 누군가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뭐야." 민호는 술통에 빠졌다가 나온 듯한 술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보는게 좀더 옳은 표현일지도. "누구야아..?" 곧이어, 민호는 다시한번 놀라야 했다.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향해진 얼굴이, 예상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민호는 잠시 벙찌고 말았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에.. 그리고는 곧 그 술냄새의 주인이 종현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종현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술을 마시고 골목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한 순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민호였다. 술기운이 있었던 데다가, 하필이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종현이기에 더 감정이 격해진 탓도 있었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종현에게 벌컥 화를 냈다. "너 미쳤어? 이시간에 여기서 뭐하는거야!!" "...흐읍.. 왜 화를 내고 그래애.." 민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당히 많이 취해보이는 종현인지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우냐?" "흐어엉.. 아니이.." "하.. 대체 얼마나 마신거냐." 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종현의 팔을 잡고 벽이 아닌 자신에게로 기대게 했다. 종현이 찬벽에 기대서 작게 몸을 떨고있는 것이 계속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짜고짜 화부터 낸 것이 조금 미안했던지라 약간은 부드럽게 말했다. "술마셨으면 집엘 가야지. 왜 여기있는거야." "과외 해야된단 말야아.." 종현의 대답에 민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 귀여운건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황당하게 귀여울 줄이야. 술을 마셔서 더 그런건가.. 민호는 웃음을 띤 얼굴로 자신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종현의 볼을 감싸쥐고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달래주는 듯이 말했다. "과외는 내일 하면 되지." "내이일...? 안되는데에.." "뭐가 안돼.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깐 내일하자. 수업 밤늦게 하면 위험해." "...왜?" "그럼 지금 수업 할래?" 종현은 저도 모르게 도리질을 했다. 술김에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는지 민호에게 기댄몸을 바로했다. 휘청거리는 바람에 곧 다시 기대야 했지만.. 종현이 헤롱거릴동안 민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민호는 일단 집에 부모님이 계시므로 안타깝게도(?) 종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집이 어디야." "집..? 훌쩍.. 죠오기~" 종현이 혀꼬인 목소리로 상큼하게(?) 손가락을 쭉- 뻗어서 가리킨 곳은 바로 민호네 집이었다.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보내도 훌쩍거리며 민호네 집을 가리키는 종현이었다. "우리집 말고, 너.네.집." "우리집..? 아~ 종현이네 집?" "...그래." 완전히 유치원생이 따로없군.. 종현이 뭐라뭐라 열심히 설명을 하긴했지만,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민호는 일단 종현을 잡고 있던 팔을 당겼다. "그럼 일단 가면서 설명해." "으응.. 으아악!" 그새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종현에 민호가 못말린다는 듯이 종현을 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종현의 앞으로 가서 등을 보이며 앉았다. 종현이 계속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답답했던 민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빨리 업혀. 안그럼 그냥 두고 가는 수가 있어." "흐익!" 종현이 두고간다는 말에 얼른 민호의 등에 몸을 실었다. 별다른 힘든 기색없이 종현을 업고 일어선 민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자가 이렇게 가벼워서 어쩌냐." "..나 오늘 진짜 많이 먹었는데에.." "뭘 먹었는데." "음... 술...?" "...됐다. 여기서 어디로 가." 등에 업히니깐 이번엔 잠이 쏟아졌는지 금새 숨소리가 점점 일정해 지는 종현이었다. 민호는 이젠 나올 한숨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미치겠네.." 민호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잠에 점점 빠져드는 종현을, 겨우 깨워서 간신히 종현의 오피스텔까지 온 민호였다. 종현이 불러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에 들어오니, 생각보다 상당히 아담한 크기의 원룸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아담한 수준을 넘어서 발을 뻗고 잘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민호는 딱 종현의 싸이즈에 맞춘 듯한 작은 매트리스 위에 종현을 눕히고는, 종현의 신발을 벗겨내었다. 이불을 덮어주었더니, 조금 뒤척이다가 금새 흠냐 거리며 잠에 빠져든 종현을 보며 민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걱정이 담긴 씁쓸한 미소였다. 민호는 한참을 종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가 문득 발갛게 얼어있는 종현의 뺨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추운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길래. 고개를 내젓고는 그나마 따뜻한 자신의 손을 얼굴에 갔다가 대주었더니 다시금 뒤척이는 종현이었다. "으응.. 더워어.." 덥다며 이불을 걷어내는 종현에, 민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은 아직도 잔뜩 얼어있는 주제에. 그래도 옷을 껴입고 있는 종현이 불편해 보여서 겉옷을 벗겨준 민호였다. 그랬더니 자면서 자신의 두꺼운 후드티를 벗어서 던져버리는 종현에 민호는 순간 흠짓- 했다. 순식간에 노출된 종현의 맨 상체에 잠버릇이 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종현이 한술 더떠서 낑낑대며 자신의 바지까지 벗어버린다. 아무래도 딱 달라붙는 바지라 답답해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함부로 벗어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민호는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며 이불을 끌어와 종현의 몸을 잘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깊은 잠에 빠진 종현을 내려다 보았다. 귀여웠다. 아니, 예뻤다. 자신이 미쳤나보다 하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민호는 종현만큼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어느정도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있었다. 그때문인 건지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민호는 살짝 벌어져 있는 종현의 입술을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내리눌렀다. 종현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두번째 입맞춤이었다. 첫번째는 종현이 아팠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했던 것이었고, 이번에도 술김에 어쩌다가 한 입맞춤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종현의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틀며 더 깊이 입을 맞추는 자신을 보며, 민호는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종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 8 "흐아아암-" 눈을 뜸과 동시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난 종현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누워있었다. 어제.. 과모임이 있어서 갔고, 술을 마셨고.... 그 다음엔....... 안타깝게도 여기까지 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 종현이었다. 그래도 집에 무사히 기어들어 온 것을 보니, 진기가 또 챙겨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종현이다. "으아..! 또 신세를 지다니! 선배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종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중에 진기한테 크게 한턱 내리라 다짐하고, 거의 반사적으로 과외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몇번 하진 않았지만, 어느새 습관처럼 몸에 벤 듯 했다. 첫 과외라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도 있었다. 첫 과외학생이 신빛그룹의 막나가는 막내아들 민호이니, 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종현은 그 부분에 대해선 이젠 크게 신경을 안쓰기로 했다. 민호가 신빛그룹 회장 아들이든 백수의 아들이든, 자신이 가르쳐야 할 학생임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종현은 생각보다 시간이 여유로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했다. 조금 몽롱하긴해도 제법 멀쩡한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생각하며.. 금새 준비해서, 늦지 않게 민호네 집 앞에 도착한 종현은 이제 좀 친숙해지려는 초인종을 활기차게 눌렀다. 띵동- -......... 어라..? 띵동- 띵동- -....... 초인종에서 응답이 없자, 종현은 지난 악몽이 떠오르며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비도 안오고, 머리가 약간 몽롱한 것 빼고는 멀쩡한 상태라 위험할 건 없지만, 그래도 그때의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종현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종현은 그래도 다시한번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띵동- 띵동- -.....누구세요. 한참 후에야 들리는 느릿한 대답에, 종현은 그제야 안심을 하며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문 빨리 안열어?!" -..성질 급하긴. 자신의 신경을 한 번 더 건들인 후, 그제서야 열리는 문에 종현은 쿵쾅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머니처럼 문 제깍 열어주면 어디 덧나나-?!" 종현은 언제쯤 기분좋게 수업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니 다행히도 현관문은 바로 열렸다. 열자마자 보이는 민호의 얼굴에, 종현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가 풀었다. 왜 저 자식은 얄미운데도 잘생기고 난리야. 종현은 속으로만 툴툴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민호도 문을 닫고 들어왔다. 종현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호가 두어계단 아래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예상했던 무표정이 아닌, 무언가 가득 담긴 표정이라 종현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종현은 그 찰나에 발에 무게를 잘못 실어서 뒤로 휘청하고 말았다.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술이 약한 종현이, 어제 술을 많이 마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지금은 과외 때문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 어...! 으아-!!!" 몸이 그대로 계단 아래로, 정확히는 민호를 향해 기울었다. 한쪽발이 중심을 잃고 계단에서 떨어졌고, 나머지 발도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꺾이며 기울어지고 말았다. 종현의 짧은 비명이 울려퍼지고, 허공을 휘젓던 종현의 팔이 무언가를 턱- 하고 붙들었다. 몸이 따뜻한 어딘가에 안착이 되었다. 종현은 심장이 쿵쿵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뜸을 들이며 꽉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뜨니, 눈앞에 바로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 놀라서 말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리는 종현과 대조되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민호는, 천천히 몸을 종현에게로 더 낮췄다.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종현이 고개를 살짝 틀자, 민호가 고개를 슬쩍 비틀며 집요하게 종현의 시선을 붙잡았다. 민호의 입이 벌어지더니, 낮은 숨소리와 함께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번엔 현관문에 코를 박더니, 이번엔 계단에서 구를라고?" "뭐..., 뭣?!" "왜, 다음번에는 창문에서 뛰어내리지 그냥." 이..이 자식이..! 비꼬는 것 좀 봐! "나미사!!" 시원하게 외쳐주며 허리에 안착해 있던 민호의 손을 탁- 쳐낸 종현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분명 해장도 제대로 했는데 왜 바보같이 중심도 못잡는거지..?! 이게 다 어제 선배들이 나한테 술을 너무 많이 먹인 탓이야...!! 해장과 머리가 몽롱한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무시한 종현이 툴툴거리며 민호의 방문을 확- 열고 들어섰다. "........"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자극하는 낯선 냄새에 종현이 잠시 멈칫했다. 이 시큼한 냄새의 정체를.. 왠지 알 것 같.. 방을 눈으로 훑던 종현은 침대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무도 큰 충격에 사고회로도 순간 멈춰버린 듯 했다. "아, 씨발.." 뒷따라 오던 민호가 욕을 중얼거리며 재빨리 방에 들어가서 창문을 열고 허겁지겁 치웠지만, 이미 늦은 듯 했다. 종현은 잠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그러니깐.. 지금 침대위에 널브러져 있는건 민호의 속옷이고.., 이 냄새는.. 그... 뭐랄까.. 남자의.. 그.. 생식을 위한 씨앗이라고나 할까.. 종현이 멍하니 민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는데, 대충 방을 치운 민호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안들어오고 뭐해." "어... 어어.. 들어가.." 더듬거리며 대답을 한 종현이 민호 옆 의자에 앉았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방안에 흘렀다. 민호는 딱딱히 굳은채 책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불카를 쏘고 있었다. 책을 펴는 종현의 손은 수전증이 있는 것 마냥 덜덜 떨렸다. 이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봐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종현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 나이 때에는 원래 누구나 다 그런거니깐. 다만, 민호는 그것을 남에게 들켰을 뿐인 것이다. 어차피 자신도 남자이니 크게 거리낄 것 없다고 생각한 종현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저.. 민호야.." "......." 종현의 부름에도 민호는 여전히 책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종현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깐.., 그럴 수도 있지..! 넌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니깐!" 순간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확- 노려봐오는 큰 두 눈에, 종현은 헙- 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하.. 내가 무..슨말을.. 그, 그럼, 수업이나 하자.." 슬쩍 민호의 눈치를 보고는, 곧 다시 어색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수업을 하기 시작한 종현이었다. 왜 하필이면.. 민호는 그야말로 쥐구멍은 고사하고, 그냥 뛰쳐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이면 종현에게 들켰으니 말이다. 민호는 열심히 움직이는 종현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저 입술에 입을 맞춘것이 화근이었다. 당시엔 잘 참고 집에 왔으나, 결국 집에서는 참지 못한 민호였다. 혼자서 욕구를 풀다가 뒷처리도 제대로 못하고 그대로 잠이들었다가, 초인종 소리에 잠이깨서 그대로 나와서 문을 열었으니.. 종현이 본 풍경이 충격적일만도 했다. 창문이라도 열어놓을껄. 뒤늦은 후회를 하며 속으로 자책하는 민호였다. 종현은 그런 민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수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힘겹게 수업하길 두 시간.. 종현에게는 고역 같았던 수업시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해방감 마저 느껴지는 종현이었다. 종현은 후다닥 가방을 챙기고 나서 일어서려다가, 아직도 수업할 때 처럼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민호 때문에 멈칫했다. 아까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줄곧 저 눈빛으로 자신을 봐왔던 민호였다. 종현은 그런 민호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시리 책을 뒤적거렸다. "어.., 음... 아! 수, 숙제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꼭 해!" "......." "대답 좀 해! 너 이제 수능 한달정도 밖에 안남았잖아." "하면 뭐 해줄껀데." "어, 어? 하면.. 성적이 오르겠지!" "됐어, 그럼. 안할래." 단호한 민호의 말에, 종현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어제 뵈었던 민호네 어머님이 떠오르며, 마음을 굳게 먹는 종현이었다. 그래, 난 민호의 선생님으로써, 민호의 성적을 올릴 의무가 있어..! "숙제 안하면!! 따.. 딱밤 때릴꺼야!" "하.하. 엄청 아프겠네." 딱봐도 비웃는 말투에, 종현은 힘이 쭉- 빠졌다. 민호를 겁줄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축 늘어진 종현을 보니, 자신이 너무했나 싶었던 민호는 인심쓰듯 말을 건넸다. "알았어, 숙제 그거 하면 되잖아." "정말?!" 갑자기 활짝 웃으며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종현에 당황한 민호는, 그대로 굳어진 채 종현을 마주보았다. 종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오버했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조, 좋아! 잘 생각 했어. 그럼, 열공해! 난 갈께..!" 인사만 던져두곤, 후다닥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종현이었다. 민호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민호의 머릿속엔, 잔뜩 들떠있던 종현의 환한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동안 보았던 종현의 모습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찌푸린 모습, 겁에 질린 모습, 당황한 모습, 우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을 봐왔지만, 저렇게 예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 민호였다. 저 얼굴을 또 보기 위해, 민호는 이번에 종현이 내준 숙제를 열심히 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인의 의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 . . 종현은 과외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쉬고픈 마음에, 겉옷도 벗지 않고 이불 위로 엎어졌다. 과외는 어찌어찌 해서 잘 끝냈지만, 몸은 말이 아니었다. 뒤늦게서야 밀려오는 두통에, 종현은 눈을 꾹 감아버렸다. 잠시 눈을 감고 쉬면, 괜찮아 질 것 같다는 생각에.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으니, 어렴풋이 무언가가 떠올랐다. 어젯밤에 꾼 꿈이었다. 언젠가 부터 민호의 생각이 잦아지더니, 결국 민호의 꿈까지 꾸었다고 생각한 종현이었다. 민호가 자신을 업고 집까지 데려다 주는.. "미쳤어, 미쳤어..! 대체 왜 그런 꿈을 꾼거야..!" 종현은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선, 이불을 푹 뒤집어 썼다. 종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어쩐지 자꾸 꿈 속 민호의 모습이 떠올라서, 종현은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다가, 문득 진기의 생각이 났다. 어젯밤에도 자신을 데려다 주느라 애를 먹었을 진기를 생각하니, 무척이나 미안해진 종현이었다. 게다가, 어제는 진기 또한 술을 많이 마셨으니, 곱절로 힘들었을 것이다. 종현은 생각난 김에 바로 진기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숙취해소 약을 사들고. 언젠가 가본적이 있었던 진기의 집을 찾은 종현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벨을 눌렀다. 매번 으리으리한 민호네 집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담한 진기네 개인주택 앞에서 기다리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와서 어색하기도 하고. 종현은 괜시리 손에 든 약국 봉투를 만지작 거렸다. -누구세요? "선배! 저 종현이에요." -종현이? 갑자기 왜.. 일단 들어와! 당황한 듯한 진기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진기가 열어준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 종현은, 웃으며 봉투를 건넸다. "선배 드릴려고, 제가 숙취해소 약 사왔어요!" "그거 주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네! 또 선배한테 꼭 해야할 말도 있구요." "할 말..? 아, 일단 들어와서 앉아." "넵!" 진기가 가리킨 쇼파에 앉아서 집안을 둘러보는 종현이다. 진기네 집은 많이 변해있었다. 분명 학기초에 왔을 때는, 어두운 색의 벽지에, 딱딱해 보이는 짙은 가구들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밝고 화사한 분위기로 싹 바뀌어 있었다. "와- 내부 인테리어 새로 하신거에요? 그 때 온거랑 많이 달라요!" "응. 어때?" "집이 딱 제 스타일이에요! 저 이런 파스텔톤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 다행이네."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뭐 마실거 줄까?" "저는 괜찮.." "아니다! 너 아직 해장 못했지?" "에?" "내가 해장라면 맛있게 끓여줄께. 기다려." 저번에 종현이 라면을 맛있게 먹던 걸 기억해내고는, 종현이 라면을 엄청 좋아한다고 판단한 진기였다. 그래서,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대답은 듣지 않고, 주방으로 가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기때문에 당황한 종현은 주방으로 따라갔다. "저.. 선배! 귀찮게 이런거 안해 주셔도 돼요." "내가 배고파서 그래. 가서 앉아있어." "그럼,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그냥 얌전히 기다려 주는게 도와주는 거야." 다정한 진기의 말에, 종현은 다시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주방으로 와서 식탁에 앉았다. 선배는 요리를 하는데, 후배가 편하게 기다리는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왜 다시 왔어?" "선배 요리하는거 구경하려구요." "그냥 라면 끓이는 건데, 요리는 무슨." 말은 태연하게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바싹 긴장한 진기였다. 종현이 뻔히 보고 있는데,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자신의 집으로 종현이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진기였다. 진기에게 종현은, 처음엔 그냥 귀여운 후배였다. 자신의 집에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하지만, 종현과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귀여운 후배에서, 챙겨주고 싶은 예쁜 후배로, 또 아껴주고 싶은 후배로 점점 마음이 발전해 나갔다. 그 마음이 지금에 까지 이르렀다. 반년 넘게 거의 매일 지켜보며, 종현을 그저 아끼는 후배만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 진기였다. 그렇지만, 막상 종현에게 고백하려니, 종현이 혹시나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다신 보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감정을 숨기기엔 자신이 없었다. 이미, 과 동기 몇명은 종현을 향한 진기의 감정을 눈치 챘기에.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종현이라고 눈치 못챌리가 없었다. 진기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한숨을 쉬고는, 종현쪽을 돌아 보았다. 진기와 눈이 마주친 종현은 진기를 향해 생긋 웃어주었다. 종현은 아무 뜻 없이 미소를 지은 것이지만, 진기는 이로써 마음을 굳혔다. 오늘 자신의 감정을 다 털어놓겠다고. "선배..! 라면 끓어 넘치려고 하는데요?!" 다급한 종현의 목소리에, 잠시 생각을 접고 허둥대며 라면을 마저 끓이는 진기였다. 그런 진기를 보던 종현이, 조용히 기다리기 뻘쭘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아참! 어제 밤에 정말 고마웠어요." "응? 뭐가?" "선배가 어제, 집까지 또 데려다 주셨잖아요." "내가?" 진기는 어리둥절했다. 오늘 아침에 자신은 동아리실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자신도 술 때문에 뻗어서, 종현을 데려다 주지 못했는데, 종현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진기가 자신을 데려다 주었다고 굳게 믿고있는 종현은 말을 이었다. "선배 덕분에 오늘 민호 과외고 무사히 했어요!" "난 어제, 술 마시고 그대로 잠들었는데.. 종현이 너 혼자 집에 간거 아니야?" "네? 그럴리가..." 술에 취했을 때, 한번도 혼자서 제대로 집으로 간 적이 없는 종현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 혼자 집에 찾아갔지? 어젯밤 일을 생각해 내려고 노력하던 종현은, 문득 그 꿈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꿈이라고 믿고 있던 사실이. 더불어, 무언가가 가득 담겨있던 눈으로 자신을 보던 민호까지. "설마.. 민호가 그럼, 진짜로...?" "민호라니?" "민호가.. 어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 꾼 꿈이 생각나서요. 저 혼자 집에 간게 맞는 것 같아요." 종현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아니, 거짓말이라는 확식도 없었다. 그게 꿈인지 아닌지 아직도 분간이 잘 안갔기 때문이다. 종현은 어쩐지 분위기가 썰렁해 진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우리, 라면 먹어요! 다 불겠어요." "..아, 그래. 얼른 먹자." 진기도 찜찜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정신없이 라면을 흡입하듯 먹은 둘은, 쇼파에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사실 종현은 진기와 같이 있긴 하지만, 머릿속은 민호 때문에 복잡했다. 어제의 일은 생각 날 듯, 안날 듯 하면서 종현을 괴롭혔다. 텔레비전 화면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건 진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에 아주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종현이 자신의 집으로 직접 찾아와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진기는 옆에 있는 종현을 슬쩍 보았다. 시선은 텔레비전을 향해있지만, 살짝 찌푸려진 멍한 표정을 보아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진기는 혼자서 조용히 심호흡을 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저.., 종현아." 자신의 생각에 너무 집중해 있는 나머지, 종현은 진기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초조해진 진기가 종현을 한번 더 불렀다. "종현아?" "..네? 저 불렀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베시시 웃는 종현을 보며, 진기는 마음을 굳혔다. 종현이 받아주진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주길 바랬다. 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종현을 향해, 오래 참아왔던 말을 꺼냈다. "종현이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네? 어떻게 생각하다뇨?" "말 그대로야. 내가 어때?" 종현은 다소 뜬금없는 진기의 물음에 당황스러웠다. 진기의 질문의 속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종현은, 더듬더듬 거리며 말했다. "음.. 편하고, 좋은.. 선배..?" "그게 다야?" "네? 그..그게.. 착하고, 또, 그러니깐..," "내가 그냥 선배다 이거구나." "그냥 선배가 아니라요..! 좋은," "선배말고, 남자로써는 아니야?" "서.. 선배..?" 종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표정이 당혹스러움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다 드러냈다. 진기는 최대한 덤덤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부담 갖지 말고 들어 종현아. 난, 너를 그냥 평범한 후배만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 그럼.." "좋아해." 부드러운 목소리이긴 하지만, 단도직입적인 고백에 종현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그래도 민호 때문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잔뜩 엉켜버렸다. 할말을 찾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종현에게 진기가 말했다. "당장에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알아주었으면 해서." "......."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깐, 내 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줄래?" 종현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재촉하지 않는 진기덕에, 종현은 조금 진정하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길고도 짧은 정적끝에 종현이 입을 열었다. "..선배. 죄송하지만, 저는요 선배를 선배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종현아." "정말.. 죄송해요 선배. 선배의 마음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선배의 마음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민호 때문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민호의 이름에, 종현은 움찔했다. 그 솔직한 반응에, 진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민호와 과외를 하고나서부터 어딘가 묘하게 달라진 종현 때문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인데, 종현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안절부절 못하다가 뒤늦게 진기의 씁쓸한 미소를 발견한 종현은, 그제서야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런거 아니에요..! 민호 때문 아니에요.. 아닐.. 거에요.." 종현은 말끝을 흐리며 쇼파에서 일어섰다. "저.., 이만 가볼께요. 안녕히 계세요." "잠시만..!" 자신을 부르는 진기를 뒤로하고 서둘러 나가던 종현은, 현관 앞에 서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종현을 뒤따라 오던 진기 또한 그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태..민아?" 진기는 현관에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자신의 동생을 보고, 당황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언제부터 거기 서있었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태민을 알지 못하는 종현은, 그를 지나쳐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태민의 목소리가 막 나가려던 종현을 또다시 멈춰세웠다. "과외 선생?" 자신이 과외해주는 학생은 딱 한명밖에 없기에, 종현이 잠시 뒤돌아서 태민을 보았다. 지나치게 차가운 표정이라, 종현은 누구냐고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네가 그렇게 대단해?" "태민아!" 잔뜩 비틀린 태민의 목소리에, 놀라서 제지하는건 진기였다. 진기가 태민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종현아, 어서 가.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다급히 가라고 눈짓하는 진기에, 종현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나갔다. 종현이 나가고 나서 자신을 나무라는 진기에도 불구하고, 태민은 한참 동안을 종현이 나간 문만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 눈은 터질 듯한 분노를 담고있었다. # 9 종현은 학교에서 진기를 계속 피해 다녔다. 같이 듣는 수업이 하나도 없긴 했지만, 같은 건물에서 듣는 수업은 몇개 있어서, 수업이 끝나면 바로 다른 건물로 뛰어가야 했다. 진기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진기를 마주하기엔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종현이었다. 게다가, 요새는 진기 뿐만이 아니라, 민호 또한 종현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더욱 복잡한 심경이었다. 원래 고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진기에게 털어놓았을 텐데, 이젠 진기한테 털어놓을 수 없으니, 답답한 종현이었다. 종현은 결국 혼자 끙끙대다가 또다시 주말을 맞이했다. 평상시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주말에도 일찍 일어났지만, 요즘들어 종현은 주말 아침에 늦장을 부리기 일쑤였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며 한숨을 쉬는 종현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평생 쉴 한숨을 다 쉰 것 같았다. 어쩐지 우울해진 종현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많이 떨구어서 여기저기 기스가 나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종현은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 거리다가 통화목록을 열어보았다. 얼마 없는 목록에는, 진기의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종현의 눈길을 끄는 건 통화기록 맨 아래쪽에 있는 민호의 이름이었다. 이 핸드폰을 사서 처음 통화했던 사람은 민호였다. 처음.. 처음이라.. 종현은 문득 민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민호가 자신에게 한 첫마디는, '..뭐하냐.' 였다. 처음에 보았을 땐, 민호가 자신보다 어리다는게 믿기지가 않았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말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내려다 보는 눈빛까지. 누가 감히 그를 고등학생이라 하겠는가. 싸가지도 밥말아 먹고,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는 최민호가 언제부터 이렇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는지, 종현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눈은, 폼으로 달고다니냐.' '야- 비켜. 거기 내자리야.' . . '넌 과외시간에 자놓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그럼 난 과외선생님이 수업도 안해주고, 와서 퍼질러 잔다고 해야겠네-' . . . '너, 병신이냐..?' '너.. 병신이냐고! 왜 대답을 안해!! 그냥 가면되지 왜 멍청하게 여지껏 비맞으면서 기다리고 있냐고!!' '내가, 미치겠다고.. 너 때문에.' '미안.. 미안하다..' 이 날 들었던 민호의 진심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다급해 보이던 운동화, 비와 땀에 젖은 교복, 자기가 늦게 와놓고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고있던 얼굴까지. 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일까. 그리고 그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민호의 눈빛까지.. 게다가 최근에, 확실하진 않지만 민호가 자신을 업고 집으로 데려다 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민호 또한.., "흐아악!! 김종현 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종현은 베게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 진정을 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럴수가!! 벌써 한시야?!" 여유를 부리다가 결국 늦은 종현이었다. 종현은 자책의 의미로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헉.., 헉..!" 어쩐지 민호네 과외하러 갈때는 항상 급하게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종현이다. 그것을 괜히 기분탓이라고 여기며, 종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민호네 집 대문 앞에 거의 다와갔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짧게 울렸다. 종현은 바쁜 와중에, 자신에게 연락온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액정을 확인했다. [뭐하는데아직도안와 -민호학생] 아직 2분밖에 안지났는데 왠 재촉문자..? 종현은 갸웃했다. 평소에 연락도 안하더니, 갑자기 빨리오라는 문자를 보내다니.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할까 생각하다가, 종현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오늘 늦은 이유는, 아침부터 민호 생각을 하느라 그랬다는 것을.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 종현은 얼른 그 생각을 떨쳐내었다. 그리고는 걸음 속도를 늦추고 답장을 보냈다. [가고있어! 아직2분밖에안지났거든?!] 보내고 나서 다시 바삐 걸음을 옮기려는데, 정말로 십초도 안되서 답장이 왔다. [선생이늦으면안되지 빨리와 -민호학생] 어쩐지 문자에서 민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종현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아니, 쓰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종현의 앞을 막아섰다. 핸드폰을 보며 걷던 터라, 종현은 자신을 막은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 읍!!"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종현은 두터운 손에 의해 입이 틀어막혔다. 교복을 입은 무리가 종현을 끌고 어딘가로 데려갔다. 한명도 아니고 다섯명이라, 종현은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종현이 있던 골목에는, 정신없는 와중에 종현이 떨어뜨린 핸드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 . "왜이렇게 안와." 민호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종현이 오는 시간에 맞춰서 안하던 방청소도 하고, 또 숙제까지 완벽히 끝내 놓은 민호는 종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종현이 늦자, 이상하게 초조해진 민호였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너무 유난스러워 보여서 결국 문자를 한 민호였다. 그런데 분명히 가고 있다고 답장까지 해놓고서는, 삼십분이 지나도 오질 않다니. 민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몇번 신호음이 가더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벌떡 일어섰다. 초조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안을 서성거리는 민호는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민호였다. 오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친건 아닌지, 아니면 길을 헷갈려서 골목을 헤메고 있는건 아닌지.. 어쩐지 종현한테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결국 민호는 외투를 집어들었다. "정말 성가시게 하는군."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는 민호였다. 감기에 걸려서 앓던 모습,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던 모습들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오르며, 불안감은 배가 되어갔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민호는 어느쪽으로 갈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으므로. 민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을 주워드는 민호의 손이 살짝 떨린 이유는, 그것을 종현이 쥐고 있던 것을 얼핏 봤던 것 같아서였다. 자신이 주운 핸드폰을 쥐고 잠시 숨을 가다듬은 민호는 액정을 켜보았다. [거의다왔] "......!" 쓰다만 문자를 본 순간, 민호는 직감적으로 종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민호는 일단 발이 가는데로 뛰기 시작했다. 지난번, 종현이 자신을 기다렸던 날보다 몇배는 더 급박했다.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종현은 보이질 않았다. 종현이 갈만한 곳을 모르는 민호는, 지난번에 종현을 업고 갔던 종현의 집쪽으로 향했다. 두고 온게 있어서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속으로는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쩐지 불안함은 증폭되어갔다. "어?! 민호 선배!!" 쉴 새 없이 뛰어가던 와중, 민호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멈춰섰다. 돌아보니, 자신의 학교 후배가 있었다. 태민과 동기인 그는, 민호와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불러세운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민호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었다. "왜." "선배는 왜 오늘 안갔어요?" "어딜." "오늘 모인다던데요?" "그런 소리 못들었는데." "그럴리가요..? 이태민이 아까 가는거 봤는데.." "뭐하는데." "저는 잘 몰라요. 누구 손봐준다고 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이태민이라.. 그럴리는 없겠지만 민호는 이상하게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모르게 누굴 손봐준다니. 대체 누구를. 민호는 자꾸만 머릿속에 종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간신히 지워내고, 후배에게 물었다. "거기 어디야." "우리 자주 가던 공원 주차장이요. 선배도 가시.. 선배!!" 민호는 장소를 듣자마자, 그대로 후배를 지나쳐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열심히 자신을 부르는 외침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써줄 겨를이 없었다. 종현이 그곳에 있을리는 없지만, 민호는 태민이 있는 곳을 향해 미친듯이 뛰어갔다. . . . "으..." 한편 종현은, 어두운 반지하 주차장 바닥에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끌려오면서 마구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엔 몇대 맞고, 또 도착해서도 도망을 시도했다가 붙잡혀서 더 맞고 말았다. 살아생전 한번도 주먹으로 맞아본 적 없는 종현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두려울 뿐이었다. 터진 입안과, 곳곳에 멍이든 몸이 쑤셔왔다. 쓰러진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손목이 뒤로 묶여 있는데다가, 양 발목도 묶여있어서 여간 쉬운게 아니었다. 한참을 바닥에서 끙끙대는데, 주차장으로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종현은 잘 안떠지는 눈을 간신히 떠서, 누군지 확인했다. ".....!" "우리 구면이지?" 지난번에 진기의 집에서 본 남자였다. 진기가 태민이라고 했었던. 진기와 가족이라기엔 전혀 안믿길 정도로, 진기와 닮지 않았다. 종현은 대체 그가 왜 여길 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태민은 곧바로 종현에게로 걸어와서, 몸을 숙이고 종현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으윽..!!" "저런, 얼굴이 많이 상했네." "저..한테 왜.., 왜 이러는 거에요.." "그 반반한 얼굴로 우리 형도 꼬시고, 최민호도 꼬신거야?" "무.. 무슨..!" "재주도 좋네. 남자를 그렇게 잘 홀리다니. 순수한척 하는게 컨셉인가?" 종현은 태민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종현은 열심히 도리질을 하며 부정을 표했지만, 태민은 무시하고 종현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종현은 묶인 발목 때문에 비틀거렸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섰다. 태민은 힘겨워 하는 종현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리 형이, 아니, 이진기가 널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아냐?" "ㅁ..무슨..," "그럼, 이진기가 고작 너하나 때문에 우리집 싹 뜯어고친거는 아냐?" "......." "술마시고 너 데려다 준 날에는, 니 걱정 때문에 잠도 못잤어. 그 정도였어, 이진기는." "......."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태민은 자신에게 좋아하는 후배가 생겼다고 고백하던 진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잘되면 나중에 소개시켜 주겠다고도 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부터 존경하고, 동경해왔던 형이었다. 그래서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을 때, 응원해주긴 했지만 한편으론 섭섭하고 씁쓸했었다. 그랬는데, 자신이 본 건, 그런 자신의 형이 매몰차게 거절당하던 모습이었다. 그때 만약 종현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보고,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래도 화는 났겠지만 이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태민은 그 때의 분노가 아직도 잊혀지질 않았다. 태민은 떨고있는 종현을 내려다보다가, 종현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맥없이 무너져내린 종현은 끝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런 종현을 내려다 보던 태민은, 시선을 들어서 종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을 보았다. 종현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공통된 표정을 확인한 태민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우리 형 힘들게 했으니깐, 딱 그만큼 댓가를 치뤄야지. 안그래?" "으흑, 흡.." "너네도 그때 최민호 때문에 머리에 깡통도 맞고 애들 여럿 깨졌는데, 분풀이 해야되지 않아?" 저번에 민호와 시비가 붙었던 상고 무리들을 향해 말하자, 그들이 환호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얼마전, 태민은 종현에게 복수해줄 방법으로 적당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이들을 불러온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말대로 한다면, 엄청난 것을 줄 것이라고 잘 구슬려서. 그리고 그 엄청난 것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미소를 띠고있던 태민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으로 굳어져갔다. 잠시후, 태민의 입에선 잔인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벗겨." 그 말에 종현이 놀랄 새도 없이 무리들이 종현에게 달려들었다. 종현은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마!!! 하지..말라고..!!" 그러나 그들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음흉한 목적을 품은 그들에게는 종현의 외침이 더 진폭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종현의 얆은 가디건은 쉽게 찢어져 나갔고, 그 안에 입은 난방 또한 금새 뜯겨져 나갔다. 종현은 울음이 터지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쉴새없이 눈물을 흘렸다. 태민은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무덤덤히 그 장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상고 무리가 종현의 바지 벨트까지 끌러내자, 종현은 거의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울음섞인 말을 내밷었다. "하지..말란 말이야..." 그 때 였다. "그만해라."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목소리에, 상고 무리가 잠시 주춤했다. 민호는 무리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의 중앙에 반쯤 벗겨진 종현을 본 순간, 민호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리들이 종현에게서 손을 떼고 민호를 막기위해 달려들었지만, 이성을 잃은 민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도를 넘어선 분노에 의해, 민호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갔다. 종현은 처음보는 민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뜬채 바라볼 뿐이었다. 상고무리가 다 쓰러지고 나서 민호가 태민의 멱살을 막 쥐었을 때, 종현이 외쳤다. "안돼 민호야..!" 종현의 목소리를 듣자, 민호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손에 힘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태민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민호를 마주하고 있었다. 민호는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왜 그랬냐." "......." "대답해봐, 이태민. 왜 그런거냐." "......." 말없이 입꼬리만 슬쩍 올리는 태민에, 민호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태민의 얼굴로 손을 뻗는 순간, 다시한번 종현이 민호를 말렸다. "그만해..!! 제발.., 그만.. 민호야.." 울먹이는 목소리에, 민호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태민에게서 손을 뗐다. 잠시 태민을 노려본 민호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종현에게로 다가갔다. 핏자국과 멍으로 얼룩진 얼굴과, 반쯤 벗겨진채 오들오들 떨고있는 몸을 본 순간, 민호는 다시한번 분노가 치밀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 자신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는 떨고있는 종현에게 코트를 입히고, 단추까지 다 채워주고는 종현을 안아들었다. 종현은 아직도 그치지 못한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민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민호는 가기전에 태민을 잠시 마주했다. 그러나, 종현 때문에 별말없이 뒤돌아서 그곳을 벗어났다. 민호와 종현이 주차장을 벗어날 때까지, 태민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자, 태민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의 끝에는 공허함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 10(完) 민호는 종현을 안고 자신의 집으로 왔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에 조심스레 눕혔다. 잠깐 잠이 들었던 종현은, 침대에 닿자마자 스륵 눈을 떴다. 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민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종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종현 또한 얌전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종현의 얼굴을 한동안 보던 민호는, 종현의 얼굴에 있는 상처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상처 치료해야 되니깐, 우선 씻자." 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시긴 했지만, 못걸을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라, 종현은 민호의 부축을 거절했다. 종현이 욕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민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 종현을 찾아다닐 때,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도 안들고 그저 무사한 종현의 모습만을 간절히 바랬던 민호였다. 그리고, 상고 무리에게 둘러싸인 종현을 보았을 땐.. 민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이 만약 종현을 조금이라도 더 건들였으면, 이정도로 끝내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민호는 다시금 타오르려 하는 분노를 잠시 눌러두고, 약을 챙기기 시작했다. 운동을 많이 하기도 했고 싸움도 많이 했었기에, 왠만한 약은 방에 다 있었다. 연고부터 시작해서, 소독약, 밴드, 심지어 붕대까지 이것저것 꺼내놓는 민호였다. 종현 또한, 샤워를 하며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납치에다가 폭행이라니. 정말 화가 날 법도 했지만, 어쩐지 종현은 태민의 탓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진기를 단번에 거절해서 상처를 준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계속 챙겨와준 진기였는데, 정작 자신이 신경쓴 사람은 민호라니.. 진기가 많이 속상할만 했다. 그리고, 태민은 그 모든걸 지켜봐 왔으니, 진기를 밀어낸 자신이 많이 미웠을 것이다. 그리고 태민이 자신에게 무슨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자신에겐 아무일도 안일어나지 않았은가. 어쩌면 화난 마음에 그냥 겁만 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건 진기도, 태민도 아닌, 민호였다. 종현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마 진기가 자신에게 품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자신은 민호에게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민호는 학생이고, 자신은 선생이 아닌가.. 어쩐지 잘못된 감정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가져서는 안될. 종현은 복잡한 마음에 벽에 머리를 기대어 놓았다. 종현의 한숨이 욕실 안 수증기에 섞여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종현은, 이미 한번 경험이 있기에 익숙하게 욕실 수납장에서 샤워가운을 꺼내입었다. 종현이 욕실에서 나오자, 침대에 누워있던 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뚫어질 듯 자신을 봐오는 민호에, 종현은 괜시리 시선을 다른데로 옮겼다. "이쪽으로 와." 민호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자신의 옆을 손으로 탕탕치자, 종현은 머뭇머뭇 거리며 다가갔다. 종현이 민호의 옆으로 가자, 민호가 소독약을 잡았다. "얼굴 대봐." "..됐어. 내가 할께." "왜. 약 엉뚱한데 바르려고?" "씨.. 아니거든?!" "가만히 있어봐. 내가 잘 해줄테니깐."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한손으로 얼굴을 고정시키고 자신의 얼굴로 약을 갖다대는 민호에, 종현은 할 수 없이 민호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소독약이 닿자, 종현은 쓰라림 때문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민호는 소독약을 바르고나서, 연고도 살살 발라주었다. 집중해서 약을 바르느라, 자신의 얼굴이 종현과 너무 가깝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채. 민호보다 먼저 그 사실을 깨달은 종현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입을 굳게 다물고 인상을 찌푸린 채 약을 바르는 민호를 보던 종현은, 부끄러운 기분에 눈을 꾹 감았다. 종현의 얼굴에 자리잡고 있는 퍼런 멍에 연고를 바르던 민호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자신의 치료를 받고 있는 종현을 뒤늦게 인지했다. 저도 모르게 민호가 연고를 바르던 손을 멈추자, 종현은 무슨일인가 해서 눈을 슬쩍 떴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미.. 민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종현의 입술을 그대로 삼키며, 민호는 두손으로 종현의 얼굴을 감쌌다. 종현은 놀라서 크게 떴던 눈을 살며시 감으며, 민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지금은 민호가 학생이고, 남자이고 이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나눌 뿐이었다. 키스가 점점 짙어질 무렵, 민호가 잠시 입술을 떼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아.. 하.." "이태민이 너한테 왜 그런거야." "......." "왜 말 못해. 내가 이자식을 그냥," "안돼!! 걔.. 우리 학교 선배 동생이란 말야..!" "그게 왜." 종현이 마땅히 대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민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왜 멍청하게 그런데 끌려가냐." "...내가 뭘.." "니가 그러고 다니면 내가 불안해서 살 수 있겠냐고." "어..?" 종현이 민호의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민호는 다시금 입술을 부딪혀왔다. 아까보다 다소 격한 몸짓에, 종현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민호의 혀가 먼저 종현의 입속으로 침투했다. 종현은 피하지 않고 같이 혀를 움직였다. 서툴었지만, 그 마음만은 온전히 민호에게 닿았다. 민호는 종현의 얼굴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서, 샤워가운의 허리끈을 풀러내었다. 종현은 갑자기 허전해진 허리에, 눈을 번쩍 떴다. 민호는 개의치 않고 종현의 가운을 양옆으로 벌렸다. 속옷만 입은 종현의 맨 몸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종현은 민호의 옷깃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민호는 입술을 점차 내려, 종현의 쇄골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종현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처음 겪어보는 애무에, 종현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다급해진 민호의 손이 종현의 브리프에 닿자, 종현은 갑자기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눈에 띄게 움찔하며, 몸을 덜덜 떠는 종현에, 민호가 반쯤 내린 브리프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종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 말까?" "미.. 민호..야.." "네가 하지말라고 하면 안할게." 종현은 진정하려고 애썼다. 아까는 무서운 불량배들이었고, 지금 민호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해도, 낮에 받은 충격이 아직은 남아있어서 자연스럽게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종현은 욕정을 억누르고 있는 민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미안함을 담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나중에.., 지금 말고.." "지금 말고 언제." "그..그게.. 너 수능 끝나고.." 다소 뜬금없는 종현의 대답에, 민호는 잠시 벙찌고 말았다. 종현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대답에, 자책을 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었다. "후.." 잠시 고민하던 민호는,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종현의 브리프를 다시 올려주었다. 그리고나서 가운을 다시 입혀주려다가, 종현의 허리에 있는 멍을 발견했다. 민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새끼들이 여기도 때렸어?" "어? 아..아니! 그건 저번에 부딪혀서 그런거야.." "..됐다, 됐어." 누가봐도 거짓말이 뻔히 보이는 말에, 민호는 고개를 저으며 옆에 둔 연고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꼼꼼히 약을 발라주었다. 약을 다 바르고나서 붕대를 집어드는 민호에, 종현이 펄쩍 뛰었다. "붕대 저리 치워! 내가 중환자야?!" 발끈하는 종현에 민호는 피식 웃으며, 가운을 도로 입히고 허리끈까지 단단히 매주었다. 그리고 종현의 옆에 누웠다. "자자." "..뭐?" "낮잠자자고." "낮잠?" "어. 오늘 운동을 격하게 해서 피곤해." "무슨 운동 했는데?" "달리기랑 태권도." "......." 설마.. 태권도는 아까 싸운걸 의미하는 것인가.. 종현이 민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게 태권도야? 그냥 주먹질이지..!" "어허. 주먹질이라니." "근데, 나 어떻게 찾은거야..?" 태권도는 그렇다 쳐도, 달리기라니.. 설마.., 날 찾아다닌 거야..? 물어도 대답이 없길래, 종현은 민호를 돌아보았다. 반듯하게 누운 민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헉.. 무슨 사람이 눕자마자 잠들어..?" 종현은 대답을 안해주는 민호 때문에 괜히 심술이 나서, 민호의 팔을 쿡쿡 찔렀다. "어? 으아아-!!" 웃음을 참으며 가만히 있던 민호는, 종현이 방심한 틈을 타서 종현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민호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된 종현은, 내려가려고 애썼다. "놔! 이 변태야..!" 하지만 민호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종현을 더 꽉 끌어안았다. 민호는 자신의 위에서 꿈틀거리는 종현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또 움직이면 아까 못한거 그냥 할꺼다." 민호의 무서운 협박에 못이긴 종현은, 결국 꼼짝없이 민호의 위에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잠이 영영 안올것 같았지만, 둘은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음날 동이 틀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다가, 종현이 민호보다 먼저 잠에서 깼다. "하암- 낮잠 진짜 잘잤다. 많이 잔 것 같은데, 아직도 밝네?" 분명히 잘때는 민호의 위였는데 어느새, 민호의 위에서 내려와서 자신이 민호의 팔을 베고 있었다. 종현은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민호의 팔을 떼어내고,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더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을 내다보고는 종현은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은 낮이 아니라, 아침이라는 것을.. "으악!! 대체 몇시간을 잔거야?!" 자신이 열두시간도 넘게 잤다는 사실에 놀란 종현은, 서둘러 민호를 깨우려 했다. "민호야! 일어..." 너무도 곤히 자고있는 민호를 깨우기가 어쩐지 미안해서, 종현은 민호의 어깨를 흔드려다 멈추었다. 그리고 땀흘리며 잔 것이 찜찜해서 씻기위해 욕실로 향했다. 종현이 샤워를 끝낸 후, 더러워진 자신의 옷들을 다 빨고, 건조기에 말려서 다시 입을 때, 그제서야 민호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이제 일어났어?" "..어." "으이그! 몇시간을 자냐?" "배고프다. 저녁 먹을까?" "무슨 저녁이야! 아침이다- 아침!!" "그래?" 별 감흥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민호는, 종현쪽을 슥- 보았다. 말끔해진 모습으로 옷을 다 입은 종현의 모습에, 민호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거보다 샤워가운이 더 잘어울린다." "빠..빨리 들어가서 씻기나 해, 이 변태야!" 민호는 버럭 대드는 종현의 머리를 한번 헤집어 놓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종현은 또다시 발갛게 물든 얼굴을 혼자 가리려고 애쓰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씨.. 아침부터 덥고 난리야..!" 금방 샤워를 끝낸 민호는, 반바지만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종현은 무심코 민호쪽을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상체를 탈의 한 것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민호는 종현을 골려주는 것이 재밌어서, 일부러 종현에게 가까이 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침 배달시킬까." "무..무슨 아침부터 배달음식이야..!" "밥도 배달돼." "됐어! 그냥 내가 해줄께!" "뭐?" 민호가 정색하자, 종현은 자신이 뭐 잘못말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배달음식 못시키게 해서 화가난건가.. 종현은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서 민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곧 민호의 맨 상체를 보고 다시 홱- 고개를 숙였다. 그런 종현의 양 볼을 감싸고 자신을 향하도록 고정시킨 민호는 재차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아침부터 배달음식 시키지 말라..고.." "그거 말고. 그 다음에." "밥.. 내가 해주겠다구.." "......." 민호가 대답이 없자, 종현은 민호가 자신의 요리실력을 믿지 못하는 줄 알고 괜히 울컥했다. "야! 나 자취해서 어느정도 요리 할 줄 알거든?! 걱정 붙들..!" 속사포처럼 내뱉는 종현의 말을 자른건 민호였다. 갑자기 닿았다가 떨어진 민호의 입술에, 종현은 멍-해지고 말았다. 왜 이자식은 갑자기 스킨쉽이 많아진거야..! 종현이 속으로 절규를 하던 말던, 민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종현이 아침을 차려준다니.. 꼭 남편의 아침밥을 챙겨주는 아내같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종현에게 어떤 앞치마를 입힐까 고민하며, 민호는 아직도 멍해있는 종현을 끌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필요한건 냉장고나 선반에 다 있을거야." "어.. 어..!" 종현은 갑자기 의지에 불타서 앞치마를 고르는 민호를 보며, 어쩐지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설마.. 저 꽃무늬 앞치마를 내가 입는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하고 종현은 절실히 느꼈다. 민호의 눈에서 나오는 불카에, 저도 모르게 얌전히 앞치마를 받아입은 종현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 중에서 가장 쉽고 자신있는 메뉴인 김치찌개를 끓이며, 종현은 어느새 옷을 다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서 자신을 구경하는 민호를 향해 물었다. "요샌 왜 가정부 아주머니 안보이셔?" "아프셔서 며칠 쉬신대." "저런.. 많이 아프시대?" "그냥 감기몸살 걸리셨나봐." 종현은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가정부 아주머니 참 착하셨는데.. 내 코피도 막아주시고.. 종현은 이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문득 생각나서 픽- 웃고 말았다. 그게 벌써 한달 전이라니.. 과외 시작한지 한달만에 학생의 집에서 요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웃겨서 종현은 결국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민호의 따가운 시선에 곧 웃음을 그치고 말았지만.. 어느새 다 끓인 김치찌개를 식탁으로 옮기고, 계란 후라이도 두개 하고, 전기밥솥에 앉혀두었던 밥을 가져오니,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아침상이 되었다. "오- 제법인데, 김종현?" "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종현은, 김치찌개를 한숟갈 맛보았다. 캬~ 누가 끓였는지, 참 잘 끓였다니깐! 자기 칭찬은 속으로만 하고, 정말 맛있게 먹는 종현이었다. 민호 또한, 종현이 해준 밥이라 착실하게 밥공기를 비워나갔다. 아침을 먹고, 다 치우고 난 뒤, 민호의 제안에 따라 둘은 거실에 있는 탁자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민호의 방이 좁은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탁 트인 거실에서 수업하니깐 느낌이 색달랐다. 종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 신기해서, 신이나서 수업을 진행했다. 한참 수업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현관문이 열렸다. 전혀 신경을 안쓰는 민호와 달리, 종현은 딱딱하게 굳어서 잘 안움직이는 목을 간신히 돌려서 현관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한번 본적이 있었던 민호의 어머니였다. 종현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민호 과외 선생님 이시구나! 오늘 일찍오셨네요?" "네..! 어제 수업을 못해서, 오늘 길게 수업하려구요." "길게요? 민호가 수업 잘 따라와 주나요?" "그럼요!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다행이네요. 그럼, 전 신경쓰시지 마시고 수업 계속 하세요." "네!" 민호네 어머니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종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우아하게 쇼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시는 민호네 어머니 쪽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민호는 종현이 자신에게 집중을 안하고, 자꾸 눈치를 보자 짜증이나서, 불쑥 종현에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이 공식을 어디에 대입해야 하나요." 종현은 순간 확- 정신이 들었다. 민호가 자신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존댓말까지 쓰다니..! 어머니가 계셔서 그런거긴 하겠지만, 그래도 과외한지 한달만에 처음듣는 말인지라, 종현은 감동까지 받아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지 여기 예제 문제에...." 종현이 설명에 열을 올리고 있던 도중, 민호는 장난어린 미소를 짓더니, 종현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 종현은 깜짝 놀라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지만, 민호는 종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둘러 설명을 마무리 지으며, 종현은 민호의 어머니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여전히 쇼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쇼파가 테이블의 바로 정면에 있진 않지만, 아주 등지고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측면이었다. 종현은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손 떼..!!' 민호는 고개를 저으며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종현은 손을 빼보려고 했으나, 운동으로 다져진 민호의 악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종현은 입술을 꾹 깨물며 민호를 노려보았다. 태평한 민호의 표정에, 종현은 민호가 절대 손을 놔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결국 포기를 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수업을 이어나가는 종현이었다.. 간신히 종현이 수업을 마치자, 그제서야 손을 놓는 민호였다. 종현은 긴장이 다풀려서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리고 싶었지만, 민호의 어머니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지친 몸을 일으켰다. "자, 이번 숙제는 여기까지! 오늘처럼 숙제 꼭 다 해놔야돼..!" "알겠어..요." 민호의 어색한 존댓말을 들은 종현은 어쩐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것 같았다. 매번 반말을 들어서 그런지, 반말이 오히려 나은 것 같았다. 처음엔 기분이 나빴지만, 이젠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니깐. 종현이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민호의 어머니께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 수업 끝나셨구나.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 보기 좋네요. 수능 얼마 안남았지만, 우리 민호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네!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종현을, 흐뭇하게 바라보은 민호의 어머니였다. -2주후 수능은 별볼일 없이 끝이 났다. 수능을 보는 민호보다 종현이 더 많이 긴장을 하긴 했지만, 종현의 걱정과는 다른게 예상외의 점수가 나왔다. 수능이 이주도 채 안남았을 때, 종현은 거의 민호옆에 붙어있다시피 했기에 가능했던 점수였다. 그리고 현재 종현은.. 민호네 집에 가는 길이다. 가채점을 해서 대강의 점수는 알고 있었지만, 수능 성적표가 나왔다고 민호가 종현을 부른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는 처음가는 것이라, 종현은 기분이 새로웠다. 그리고 아쉽기도 했다. 이제 더이상은 과외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종현은 아쉬움을 감추기 위해 민호를 보자마자 툴툴거렸다. "그냥 성적표 찍어서 인증샷 보내면 되지, 날 여기까지 오게하냐?!" "왜. 나 보러오기 싫었어?" 늘 보던 눈빛이지만, 항상 그 눈빛에 쫄던 버릇이 남아서, 종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어졌다. "그.. 그건 아니지만.." "이제 논술 과외 해줘야지." "뭐? 왜..왠 논술..?" "나 수시 쓴거. 논술 대비 해달라고." 논술.. 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민호의 말에, 종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일단 성적표부터 줘봐." [언어 4, 수리 4, 외국어 4, 탐구 5] 가채점 했을 때보다 더 높게 나온 등급에, 종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호가 논술 대비 한다는 말이 아예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전부 7,8 등급을 맞던 예전보다 훨씬 등급이 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논술을 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점수라, 종현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민호는 그런 종현을 눈치채고는, 재촉했다. "왜. 너무 못봐서 논술 가르쳐주기 싫어?" 종현은 민호의 눈치를 보았다. 과외해주는 것은 좋으나, 해도 승산이 없는 과외라 어쩐지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민호의 불타는 눈빛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종현은 울며 겨자먹기로 대답했다. "아..알았어! 논술 대비 해주면 되잖아..!" 종현의 대답에, 민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사실, 논술이나 대학같은건 자신에게 별로 중요하진 않았지만, 종현과의 과외를 끝내기 싫었던 민호였다. 민호는 일단은 과외 연장을 한 것에 만족을 하며, 또다른 만족을 위해서 종현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종현은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괜히 동작을 크게하며 일어섰다. "아- 이제 가야겠다. 집에 가서 할일이 많네, 하하." 교과서 읽듯 어색하게 말하는 종현을 보고 피식 웃은 민호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너 뭐 기억나는거 없어?" "ㅁ..뭐?" "나 수능 끝났는데." 민호의 말을 인지한 종현은, 애써 잊으려고 했던 장면이 한꺼번에 모두 떠오르고 말았다. '..하지 말까?' '미.. 민호..야..' '네가 하지말라고 하면 안할게.' '..나중에.., 지금 말고..' '지금 말고 언제.' '그..그게.. 너 수능 끝나고..' 종현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빨갛게 상기된 종현을 보고, 민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저 하기로 했잖아." "지.. 진짜해?" "그럼 안해? 너 그때 거짓말 한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안무섭게 할게." 이 말을 끝으로, 민호는 종현을 안아들고 침대로 가서 눕혔다. 민호가 종현의 가디건 단추를 하나하나 풀러 내려갔다. 민호의 조심스런 손길에, 종현은 그 때의 공포심이 다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민호를 말려야 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걸 보니, 자신이 민호를 이정도로 좋아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어느새, 맨 몸이 된 종현은 민호에게 자신을 맡겼다. 그동안의 어떤 스킨쉽 보다도 더 뜨겁고 열정적으로 둘은 방안에 열기를 더해갔다. 민호가 종현을 잘 달래가며, 마침내 종현의 안으로 깊숙히 들어선 순간이었다. 종현은 터져나가는 신음속에, 자신의 진심을 내비추고 말았다. "하앗..! 민호..! 읏.. 좋아.., 좋아해..!" 민호는 일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까 종현을 달래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잔뜩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고?" "좋아..한다고.." 종현은 겁이 났다. 민호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종현은 갑작스럽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린걸 후회하며, 민호를 올려다 보았다. 민호는 무표정으로 종현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실망이다." 민호의 말에, 종현은 당황했다. 좋아한다고 했다니 실망이라니.. 자신의 마음이 가볍다고 생각한 것일까. 만난지 한달 조금 안됬는데, 이렇게 몸을 내줘서 실망한 것일까. 종현은 눈물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어쩌면, 민호는 자신을 단순히 가지고 놀았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이 행위가 끝나면, 자신을 버릴지도 몰랐다. 민호 또한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해진 종현이었다. 종현의 생각이 점점 끝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널 사랑하는데. 넌 고작 좋아하기만 한다, 이거지." 민호의 말에, 종현이 얼이 빠져서 멍하게 되물었다. "어..?" "사랑한다고, 김종현." 민호의 말뜻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종현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순간에 지옥과 천국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민호는 종현의 울음을 그대로 삼키며, 다시금 멈추었던 허리를 아까보다 더 격하게 움직였다. 서로의 마음을 이제서야 제대로 확인한 그들은, 지칠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민호의 크고 좋은 침대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날때까지.. 샤워를 끝내고, 나란히 누워있던 중에, 민호가 생각났다는 듯이 종현을 향해 돌아누웠다. "나 수능 전부 5등급 안에 들면, 좋은거 준다고 했지." "어.., 어! 그랬지.." "끝났으니깐 빨리줘." 단순히 밥을 사주려고 했던 종현은, 우물쭈물했다. 어쩐지 이 타이밍에 밥을 사준다고 하면 민호가 화낼 것 같았다. 종현이 적당한 대답을 찾고있는데, 민호가 먼저 선수를쳤다. "아니다. 이미 가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 가졌다니..?" "김종현 너, 이제 내꺼라고." 종현은 터질듯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민호를 와락 껴안았다. 민호는 종현의 허리를 감싸며 장난스레 말했다. "나 논술 잘봐서 너 있는 대학 붙으면 그땐 결혼 어때?" 분명 농담이 맞는데 민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종현은 헷갈렸다. 민호의 성적으로는 절대 자신의 대학을 올 수 없는데, 저런 굳은 의지의 표정이라니.. 설마, 진심인건가..?! "나있는 대학 오려면, 평생 공부만 해야돼!" "그럼, 니가 나 평생 과외 해주면 되겠다." 민호의 말에 종현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장난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 민호와 과외하는 것이. 종현은 자신을 안고있는 민호의 귀에 대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좋아, 우리 평생 같이 과외하자." . . . +外 "야! 최민호!! 너 숙제 또 안했어?!" "미안, 까먹었어." "까먹을게 따로있지..!" 종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민호를 째려보았다. 민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종현에게 다가갔다. "저리가!" "왜그래, 종현아." "오늘 거실에서 수업할거야!" "아 오늘 우리 엄마 있는거 알잖아." "그니깐! 너 딴짓 못하게 거기서 수업할거야!" 종현은 화나서 씩씩거렸다. 분명 저번주에 키스해주면 숙제 다하겠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찐하게 키스까지 해주었건만..! 이건 자신의 키스를 무시한게 아닌가..! "너 재수생이 그렇게 공부하면 안되는거야!" 민호는 평생 과외를 하자는 말이 농담이 아닌지, 진짜로 재수를 택했다. 민호의 집안에서는, 막내아들이 Y대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한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종현이 가르쳐줘야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한 민호 덕분에, 결국 종현은 일주일에 네번이나 민호네 집에 오게 되었다. 종현은 민호가 요구(예를 들면 키스 같은 것)를 들어주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과외를 하며 이런저런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기껏 지금까지 가르쳐 왔는데, 공든탑이 무너지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요구에 다 응해주었는데.. 숙제를 안하다니!! 종현의 고집에 따라, 둘은 거실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민호의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쇼파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있었다. 종현은 왠지 긴장이 되었다. 괜히 거실에서 수업하자고 했나, 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자신의 손위로 민호가 손을 겹쳐왔다. 종현은 이럴줄 알았다는 듯, 손을 빼려 했지만, 민호는 손을 더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이거 모르겠어요." 소름끼치도록 낮은 그 목소리가 뭘 뜻하는지 알면서도 종현은 태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를..?" 종현의 물음에 민호가 친절히도 문제 하나를 딱 가리키며 대답한다. "여기, 이 문제요." 문제까지 짚으며 말하자 더이상 피할 길이 없어진 종현은 할 수 없이 민호의 문제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슥- 몸을 기울자마자, 역시나 허리에 감겨오는 건 민호의 길고 단단한 팔.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조금.. 위험한 과외.. fin. (2013. 3 .17.) - 안녕하세요! 제이치입니다^^ 저의 첫 장편이 드디어 완성 되었네요! 매번 단편만 써서 그런지, 길게 쓰려니까 부족한게 많네요ㅠㅠ 특히, 중간에 연재를 중단했던 그 공백기에 대해 정말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글이니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저는 이만..ㅎㅅㅎ 뿅!